버스 터미널 건너편 시내버스 정류장. 왼쪽 아주머니의 선그라스와 가디건의 컬러 매칭이 인상적이다.
체 게바라 기념관.
1956년 어느 새벽 82명의 젊은이들을 태운 요트 그란마 호가 멕시코 해안을 떠난다. 카스트로 형제와 혁명군들은 멕시코로 망명해서 군사훈련을 받고 드디어 고국의 독재자 바티스타를 무너뜨리기 위해아르헨티나 출신인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로 향한 것이다. 일주일 만에 쿠바 해안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한 것은 정부군의 총알세례 뿐이었다. 12월 2일. 고작 12명의 게릴라들만이 겨우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숨어 들어간다. 고단하고 보잘 것 없던 혁명세력은 1957년 미국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그 실체가 보도되면서 쿠바 대중에게 알려졌고,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통해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의사 체 게바라였다. 체는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다. 농업생산과 교통의 중심이었던 산타클라라를 확보함으로써 혁명의 결정적 동력을 얻은 혁명군은 이듬해 하바나로 진격했고, 전의를 상실한 정부군의 무저항과 투항 속에서 쿠바의 공산 혁명이 완성된다.
쿠바 혁명의 현실적 토대를 만들어 준 산타클라라의 별명이 혁명의 도시 혹은 체 게바라의 도시인 이유다. 도시 곳곳에 자랑스럽게 내걸린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사진들, 각종 조형물들은 쿠바 혁명에 대한 이 도시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려준다.볼 일을 마치고 터미널에서 나와 대략 15분 정도를 걸어서 체 게바라 기념관에 도착했다.
체 게바라는 권총이 아니라 소총을 들고 있다.
체의 생애와 스타일은 스타성이 있다.
게바라가 소총을 든 모습의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 아래에 체 게바라의 연대기와 시신이 있는 박물관이 있다. 안에는 핸드폰을 포함해서 어떤 장비로도 촬영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줄을 서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하는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손으로 안쪽에 서 있던 아가씨를 가리키면서 저 친구가 한류팬이라고 알려줬다. 손을 들어 ’올라’라고 했더니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쿠바에까지 한류라니. 전 세계 어느 민족이 이토록 다재다능할 수 있을까?
박물관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그리고 체의 생애는 뭔가 묵직하고 뜨거운 열기로 다가왔다. 지적 허영에 휩싸인 채 운동권 언저리에서 살다가 부르주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변절한 그 숱한 대한민국의 가짜 혁명가들에게 체 게바라는 뭐라고 말을 할까?
쿠바에서 온전하게 체를 느낄 수 있는 곳. 여기를 봤다면 산타클라라에서 당신이 할 일은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맥주인지 음료수인지...폼은 딱 맥주인데 아침부터...
관람을 다 마치고 기념관 앞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1 cuc을 주고 피자와 주스를 사서 먹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비달 공원 쪽으로 걷다가 다시 마차를 잡아 탔다. 아침에 1 cuc으로 마차를 탔으니 가격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차 안에는 여학생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수줍게 웃음 짓는다. 비달 파크 근처에서 내릴 준비를 하면서 동전을 꺼내 세는데 여학생 하나가 5 cup짜리 동전을 뺏어 가더니 젊은 마부에게 뭐라 하면서 건네준다. 세상에나. 이들은 단 5 cup을 주고 마차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친절한 여학생 덕분에 공짜나 다름 없는 단돈 백원에 마차를 한 번 더 타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