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가 쓴 자기계발서를 모두 버렸다

유명 마케터는 훌륭한 기획자가 아니었다

by 임용

대기업 사무보조로 일을 할 때 창고 정리하며 우연히 초기 제품 기획서를 발견했다. 유명한 그의 이름이 표지에 적힌 기획서였다. 몇 년 전 그가 기획, 총괄하여 제품이 탄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획서가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이름이 적힌 기획서 표지를 보자 설렜다. 어떤 시각과 생각이 제품을 메가 히트(연간 1000억) 매출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기획서를 발견하고 읽다 보면 배울 점이 많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그처럼 될 수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한 장 한 장 그의 기획서와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희망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특별함 없고, 독단적인 그의 실체에 실망했다


기획서 내용은 치밀한 분석도, 특별한 제안도 없었다. 두리뭉실한 고객 분석과 구체성 없는 제안 내용만이 담겨 있었다. 물론 기획서만으로 그를 모두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기획서를 기반으로 출시된 제품은 특별해졌고, 사람들은 그 제품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가 상품이라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기획서였다.

실망이 가득한 느낌을 지니고 있던 어느 날. 팀장은 그와 함께 일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메가 히트 매출을 만들어냈지만 많은 비용과 그의 무리한 요구로 주변의 희생이 꽤 컸었다고 했다. 표와 기획은 시장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요구들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기획 내용 굽히지 않고, 강압적인 태도로 직원들에게 일을 진행시켰다. 물론 신규 카테고리를 창출해 냈기에 그의 안목과 추진력은 인정할만했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희생에도 그는 자신의 업적만을 챙겼다.

나는 팀장의 이야기에 꽤 놀랐다. 반신반의했던 팀장의 이야기라고 넘기고 싶었다. 몇 개월 뒤 다른 회사로 이직한 그는 불미스러운 일과 갑질로 언론의 비판적인 기사로 등장했다. 그 기사를 보자 나는 팀장의 말이 사실임을 알수 있었다. 멋진 유명세가 빛 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처럼 되지 않겠다는 롤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실체를 알게 되니, 역으로 되지 말아야할 롤모델이 되어있었다. 반대로 나만의 강점과 역량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겸비해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책장에 꽂혀 있던 그의 성공이야기를 담은 자기 계발서를 버렸다. 대신 실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업직을 찾아 지원했다. 또한 스터디를 모아 매주 마케팅 전공 기본 공부도 다시 했다.

영업으로 입사 후 회사에서는 항상 하고 싶은 기획이 있으면 함께 일하는 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목표에 대해 어떻게 협조를 요청할지 고민하며 일했다. 물론 설득하거나 만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설득을 위해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대안을 준비했다. 힘들지만 그처럼 독단적인 리더는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어렵고 먼길이지만 내 스타일에 맞는 기획자의 방향을 선택했다.


동료와 후배에게 공을 돌리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많은 기획자, 마케터들이 제품이 히트할 때면 자신만의 명예로운 훈장으로 여긴다. 기획이나 담당자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거쳐 제품이 히트한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박수 쳐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 제품이 히트한 것은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회사 구성원 모두 협업하고,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기획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메가 히트 제품을 기획하면 좋지만 꼭 그것을 해내기 위해 독단적인 기획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유명해지려고 이 업을 택한 것도 아니고, 그처럼 누군가를 희생시켜서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단지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해결해가는 기획에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내 업무 스타일을 묵묵히 걸어갈 예정이다. 내부, 외부의 모든 고객 한 명도 소중히 생각하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급작스러운 혁신으로 세상을 바꿔가는 특별함보다 작은 것 하나를 바꿔가며 작은 변화들을 모아 혁신을 만들어내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그러다 혹여 내 제품이 히트하게 된다면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먼저 공을 돌리는 겸손한 기획자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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