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에 온 뒤로 우리는 주말마다 레오를 데리고 바다로, 산으로, 들로 산책을 다니고 있다. 습도는 낮고 햇빛은 따사로운 말 그대로 청량한 날씨가 계속되었던 9월부터 나는 주말에 소소하게 행복했다.
가을산은 여름의 짙은 내음을 지나 한풀 꺾인 엽록소의 향기로 은은하다. 모든 나무들이 노란색, 초록색, 갈색, 빨간색 또는 그 중간의 어느 색으로 다채롭고 따뜻하게 가득 입혀져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발에 차이는 그 고운 색의 나뭇잎들과 간혹 머리에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잎을 볼 때면 내가 어느 계절에 살고 있는지 체감하게 된다.
굳이 산까지 가지 않고 집 근처만 산책해도 '와 날씨 좋다'를 입에 연신 매달며 걷게 된다. 그늘은 적당히 서늘하고 햇빛은 적당히 따뜻해서 걸을 때 최적의 온도가 된다. 맨투맨 하나로도 멋을 부릴 수 있는 계절이다.
그러다 지난 주말엔 레오와 단둘이 집 근처 공원을 갔다. 레오가 좋아하는 볕이 드는 잔디에 함께 앉아 축복 같은 날씨를 만끽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 아닌가. '30대 후반부터 감성병이 도지는 건가' 싶은 찰나 이 감정은 지난번 친정집 옥상에서 레오와 공놀이하다 울컥한 그것과 똑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레오와 단 둘이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형태의 행복감을 그리워하다, 지금은 셋이 되었는데도 어쩌다 둘만 남겨지면 예전에 그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한테 남편이 그렇게나 큰 존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때쯤, 양반은 못 되는 남편이 전화를 했다.
"아까 배고프댔잖아. 고로케 사 가지고 갈게. 초코우유 먹을래, 딸기우유 먹을래?"
웬 초코우유, 딸기우유? 결혼 후 한 번도 내 돈 주고 초코우유나 딸기우유를 사 먹은 역사가 없는데 어이없어하며 '아아'를 주문하고 잔디에 계속 앉은 채로 그를 기다렸다.
외로워서 핑 돌던 눈물을 머쓱해했던 그 시간이 남편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바뀌었다. 이제 왔으려나 공원 입구를 들어서는 사람마다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는 나를 보니, '나는 타인으로 인해 행복하고, 타인은 나로 인해 행복하다'는 그 말이 실감되었다.
출출하다는 한 마디를 기억하고 내가 좋아하는 김치고로케를 공원에 사 들고 오는 남자. 배고플 때 지금 먹으라며 레오 리드 줄을 넘겨받아 먹고 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자. 왜 이렇게 급하게 먹냐며 천천히 먹으라고 말하는 섬세한 이 남자.
남편은 나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면 그 누구보다 귀한 인격체가 된다. 남편의 존재의 무게가 매우 무거웠음을 고로케를 베어 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을이 좋은 게 아니라, '남편과 함께 하는 가을'이 좋은 거였다.
매년 가을은 똑같이 청량하고, 나뭇잎도 낙엽도 똑같은데 달라진 것은 남편이라는 존재의 결핍을 겪은 이후에 함께 처음 맞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역시 한 번 잃어보고 없어봐야 좋은 것도 다시 알게 된다. 계속 함께였더라면 알 수 없었을 서로에 대한 고마움에 요즘 우리 사이는 참 정답고 다정하다.
그렇게 나는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서로를 통해 계속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