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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Oct 21. 2023

방 한 칸짜리 미니멀리스트

드레스룸, 서재, 침실을 방 한 칸으로


시댁에서 산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내 집에서 살다 시댁으로 들어오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변화는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댁은 전 국민 아파트 평형수라는 32평 방 3개짜리 집이다. 하나는 안방, 하나는 옷방이고 남은 조카 놀이방을 치워 우리 방으로 만들어 주셨다. 퀸 침대 하나 놓으면 더 세간 놓을 공간이 없는 이 아담한 방에 우리는 두 식구 살림을 욱여넣어야 했다.


34평 이전 집을 정리할 때 그렇게나 당근으로 팔고 무료 나눔을 했어도(내 당근 온도는 54도가 되었다...) 침대, 의류, PC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는데 옷장과 PC 놓을 공간이 방에 남질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어머님이 아이디어를 내 쿠팡에서 주문하여 옷걸이를 조립해 나의 간이 드레스룸을 침대 아래쪽에 만들어 주셨다. 강아지털이 휘날려 검은 옷에 달라붙고 먼지 쌓이는 게 눈에 보이지만 한 공간에서 자고 옷도 고르고 갈아입기도 하니 동선 걱정할 필요도 없이 편한 매력이 있었다.

옷 걸을 랙이 한계가 있으니 계절이 지날 때마다 옷도 서둘러 정리하게 되는 이점도 있었다.


침대 아래 만든 내 드레스룸



그다음 고민은 PC였다.

나는 집에서도 컴퓨터 활용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PC로 브런치에 글 쓰기도 하고 이북을 읽기도 하며 새벽에 온라인 강의를 보기도 하고 여러 공부를 한다. 노트북이 있었지만, 난 PC가 편했다.


이미 방은 침대와 옷걸이로 대부분의 공간이 채워진 상태인지라, 침대 옆 모서리를 활용해야 했는데 작은 책상이라면 의자를 책상 안에 쏙 넣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쿠팡에서 1인용 조립식 책상을 주문하고 모니터를 올리니 그럴싸해지긴 했는데, 내가 하려는 공부를 하려면 듀얼모니터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서브모니터 놓을 공간이 없네...?^^;;


그때 번뜩이는 아이디어! 

조카가 가끔 식탁으로 사용하는 어린이 캠핑용 책상을 아래쪽에 붙여서 두꺼운 책을 올리고 모니터를 올리면 대략 모니터 2개 높이가 비슷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해결하고 본체를 바닥에 내려두니, 이번엔 본체와 모니터 연결 선이 짧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때 남편의 아이디어! 

모니터 아래 책이 아니라 본체를 눕히고 모니터를 올리면 다 해결되잖아?


본체 환기구에 먼지가 직빵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왼쪽 모니터 아래 본체, 본체 아래 조카 책상이 있다.



그다음 깰 퀘스트는 화장대.

이 방 안에 뭘 놓을 공간은 더 이상 없다. 난 출근 때마다 거울을 보고 사회적 예의를 갖출 준비를 해야 하는데... 화장실은 샤워하고 나와 김이 서려 있어 적합지 않고, 아!!! 신발장이 있었다!


어차피 5분 만에 화장을 끝내는 나는 화장품 몇 가지면 되었기에, 신발장 얕은 턱에 화장품을 올려 두고 화장을 해 보았다. 마침내 방이 출입구 앞이었기에 동선의 효율화가 끝내주었다.

문제는 신발장 조명은 센서등이라는 거.


열중해서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다 보면 어느새 얼굴이 납빛이 되어 있다. 10초에 한 번씩 천장 센서등에게 발을 뻗어가며 내 존재를 각인시켜야 한다.


불이 켜졌다... 꺼졌다...




굳이 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코웃음이 쳐진다. 조금 깊이 곱씹을라 치면 자기 연민이 훅 올라온다.

드레스룸, 서재, 침실을 작은 방 하나에서 해결해야 하는 내 신세에 대해.

'도대체 내가 무슨 팔자기에 방 한 칸짜리 신세로 전락한 것인가...'


그때 유명한 그 예화가 떠오른다.

컵에 물이 반 남았을 때, 혹자는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고 혹자는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한다고.



극강의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체험한 내가, 내년에 내 집을 꾸릴 때 얼마나 기똥차게 단정한 집을 만들 것인지 예감되지 않는가?

여유 공간이 없어 뭐 사질 않으니, 쓸데없는 소비가 줄어 생활비 다이어트가 되고. 


사람 사는 데는 대단히 뭐 엄청난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본질을 깨닫는다.


본질은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느끼고 받아들이는가'이다. 



내 살림을 하지 않고 있는 지금, 나는 내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 투자하고 성장하고 있기에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도 떠안을 만하다.


무엇보다 시댁살이가 서럽기는커녕 아침마다 며느리 샐러드까지 만들어주시는 어머님께 큰 사랑을 배운다.


지금 이 시간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행복의 핵심은 변치 않고 있음에 감사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함으로써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망치지 말라.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당신이 한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속한다.
-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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