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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l 11. 2024

나의 선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흥미롭게 읽은 책 이야기를 쓰려고 제시어를 '선'으로 던졌는데... 역시, 쓰려고 작정한 이야기는 쓸 수 없는 게 필연인가. 다른 선이 우연히 훅 치고 들어왔어. 


  아마도 선은 한 번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언니는 왜 나만 보면 질질 짜지?’

  유독, 선 앞에서는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다.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 아니, 내가 몰라서 그렇지 뭔가 있으려나. 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눈 맞추며 듣다 보면 어느새 나는 울고 있다. 선은 주로 웃기면서도 황당한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웃으면서도 자꾸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아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선과 함께 있으면 어떤 불가항력적인 입력 값이 설정되어, 눈물로 어김없이 출력된다.

 

  선은 절친한 친구 명의 동생이다. 남선과 남명. "선아, 명아"라고 부른다. 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던 단짝이다. 나는 문과, 명은 이과였는데도 우리는 함께 점심, 저녁을 먹었고, 같은 독서실을 다녔고, 틈틈이 영화도 보았다. 명아네 놀러 가면 선아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명아네 집은 버스도 하루 몇 대 다니지 않는 외딴 곳에 있었다. 말괄량이 선아는 그곳에서 강아지 포동이와 시간을 주로 보냈다. 포동이와 신나게 뛰어다니며 씩씩하게 잘 노는 선아에게 눈길이 자주 머물렀다. 


  선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함께 지내던 포동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셋이 몇 년 간 함께 살았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서울 화곡동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고, 선과 명은 큰 방을 나는 작은 방을 썼다. 삭막한 도시 생활. 우리 셋은 서로에게 많이 의지했고, 자주 다투기도 했다.


  명아와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선아도 동생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워졌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 알겠는 무언가가 있었다. 선아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선아에게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다. 보통 고민을 말하다 보면 더 상처받고, 꼬이기도 하는데, 선아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잘 들어 주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다. 선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도닥여주는 손길. 말이 촉감으로 닿았다. 


  어느 날, 갑자기 선은 개명을 했다. '유안'으로. 웃을 유에 편안할 안. 이름도 작명소에서 짓지 않고 본인이 직접 지었다. 개명 후, 가장 긴 시간 동안 선아라고 부른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지금이야 자연스럽게 유안으로 부르지만, 내 마음속에는 항상, 선아가 있다. 

  

  유안. 이름대로 유안을 만나면 울어도 편안했다. 그간 쌓여 있던 슬픔이 꽁꽁 얼어있다가 유안이의 웃음과 웃긴 이야기에 스르르 녹아 눈물로 흐르는 건 아닐까.  

  

  유안도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 여전히 말괄량이. 컬러 서클 렌즈를 끼는 멋쟁이. 한껏 멋 부리고 친구들과 1년에 한 번은 꼭 여행을 가고, 명랑한 두 아이의 엄마로 발랄하게 살아가고 있다. 몇 달 전에도 유안을 만났는데 나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으며 커피를 마셨고, 해물탕을 국물을 마시면서도 훌쩍였다. 


  우는 나를 보고도 유안은 "언니 왜 그래? 왜 울어?" 한 번을 묻지 않는다. 재미있고 웃긴 이야기를 계속이어간다. 한 번 유안에게 말한 적 있다. 

  "이상하게 네 눈만 보면 눈물이 나." 

  지금도 유안의 눈을 떠올리니 눈물이 차오른다. 유안과 명은 친구이면서 가족의 모양이 되어간다. 내 어두웠던 마음속을 밝혀주고 차디차게 식은 손을 잡아 준 따뜻한 존재들. 우리 셋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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