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내게 다소 가혹한 감이 있네. 문자로 사사프로젝트 제시어 '짝'을 보는 순간, 나의 첫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너의 짝도 떠올랐어. 언제 이 남자다 싶었냐는 물음에 너는 그와 등산 갔을 때 이야기를 했어. 나뭇잎 피리를 불며 가는데... 이 남자가 내 짝이 되겠구나 알았다고. 으아~ 낭만이 마구 몰려온다.
과연 나에게도 짝을 알아보는 그런 낭만적인 순간이 찾아올까. 짝에 대해 무엇을 쓰게 될까? 짝 없는 가혹함? 서러움? 저것들은 내키지 않는데... 과연 무엇이 나올까. 짝짝꿍! 짝짝꿍!
짝이 된 풍경
여자는 남자와 산책하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 편안한 대화. 두 사람은 친구나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와 남자의 대화에 귀 기울여보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쩌다 함께 산책을 하게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따로따로 나왔는데,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자연스레 말이 오가고, 나란히 걷게 된 셈.
남자는 속눈썹이 짙고 길었으며 다정한 목소리였고, 사물을 보는 시선은 따뜻했지만 눈을 마주쳤을 때 잠재된 슬픔이 느껴졌다. 여자는 밝고 명랑한 걸음걸이였지만, 말을 할 때는 지나치게 신중해서 대답을 한 템포씩 늦게 했다. 둘의 걷는 속도는 잘 맞아서 여자가 속도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남자가 부러 늦게 걸을 필요가 없었다.
숙소 주변을 걷는데, 오르막이 나왔다. 남자는 조금 앞서 걸었고, 여자는 몇 발 짝 앞서 있는 남자를 보며 걸었다. 갑자기 비가 떨어졌다. 남자는 우산을 펼쳐 자리를 내어 놓고, 여자는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함께 쓰고 걸으니, 대화가 없어졌다. 기분 좋은 긴장감. 설렘이라고 해야 할까. 둘은 서로에게 다정해지는데, 그 순간. 걸음걸이마저 부드러워졌다. 발이 딱딱 맞았다.
오르막의 정점에서 만난, 놀라운 풍경. 맑고 투명한 잔잔한 바다. 거북이들이 천진하게 헤엄을 치고 그 사이를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살랑이며 움직였다. 바닷속 풍경을 빨려 들어갈 듯 바라보다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서로 바라보기만 반복하며 감탄했다.
숙소 주변에 이런 풍경이 있다고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여행책자에도 소개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숙소 주인도, 여행책자도 꼭 가보라고 권해야 당연한데 말이다.
둘은 몰랐다. 방금 본 풍경은 오로지 둘이 함께 만들어낸 가상현실과 같은, 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었음을. 타인에서 짝이 되는 순간은 오롯하며 생명력 넘치는 현실 너머의 세상이었다. 말로 설명하고 글로 묘사하기는 불가능했으며, 둘의 마음속에서 넘실거리는 파동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남자의 우산은 여자 쪽으로 기울어졌고, 그 기울기만큼 여자를 향한 마음도 각별해졌다. 우산으로 흡수되는 남자. 모습은 처음 봤던 남자 그대로였지만, 여자는 남자의 모습에 우산이 겹쳐 보였다. 남자이면서 우산 같은. 사물이 사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어떤 밀착. 마법 같은 풍경이었다. 좀 전까지 보았던 바다는 사라졌고 한 몸처럼 여겨지는 남자와 우산.
숙소로 돌아왔다. 여자의 손에는 우산이 쥐여있었다. 남자도 뒤이어 들어왔다. 처음 숙소를 나설 때와는 다른 여자와 남자였다. 둘은 짝의 길로 들어서보기로, 용기 내서 함께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둘이 공유한 마음의 풍경은 서로를 오가는 중이었다.
짝과 사탕
위 글 '짝이 된 풍경'은 며칠 전 꿈을 꿨던 내용 중에 기억나는 몇 장면을 엮고 덧붙인 글이야. 다 쓰고 하루가 지났을 즈음, 얼굴 하나와 이름 하나가 떠올랐어. 초등학교 때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 안 남) 내 짝이었던, 까만 피부, 큰 눈, 단단하게 마른 몸, 임땡땡
이름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다. 제비 뽑기를 해서 짝을 정했을 거야. 짝이 정해지기까지는 항상 두근거려. 혹시라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앉게 될 수 있을까 봐서. 내 짝이 그 애라고 정해지자마자, 나는 크게 실망했어. 내 자리로 겨우 갔어. 공부도 못 했고, 까맣고 빼빼 마른, 뭔가 없어 보였던 임땡땡.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에 금부터 그었어. 넘어오면 다 내 거야.라고 얌체같이 말했지. 싫었어. 그 아이와 짝이 된 게. 내 지우개가 금을 넘어갔는데, 녀석이 은근슬쩍 지우개를 내 쪽으로 밀어주는 거야. 적잖이 당황했어. 나라면 아싸 하고 가졌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조용히 도와주기도 했어.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 안 나지만 녀석의 보살핌은 느껴졌어. 몇 번 반복되니, 녀석을 싫어했던 마음이 꾸멀꾸멀 사라졌어. 책상에 금도 지우면서 선심 쓰듯 말했지.
“이제 금 없으니까 넘어와도 돼.”
녀석은 슬며시 웃었던 거 같아. 오빠처럼 나의 철없고 싹수없는 행동을 귀엽게 보아주었던 것도 같아. 이상하게 든든했어.
녀석의 목소리는 못 들어봤어. 늘 주눅 들어있는 눈빛. 엄마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엄마는 학교에서 유명했어. '슈퍼맨 아줌마'라고 불렀어. 풍만한 체구와 넘치는 에너지로 늘 바깥을 날뛰며 휘젓고 다녔거든. 미쳤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 등 말이 많았지. 아이들은 혹시라도 슈퍼맨 아줌마를 만나게 될까 봐 피해 다녔어. 칼을 들고 다닌다는 위험한 소문도 돌았거든.
나는 슈퍼맨 아줌마를 몇 번 마주쳤는데, 칼을 들고 있거나 나를 위협하지 않았어. 그저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어. 몸은 무르게 살이 쪄서 둥실둥실했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경쾌했어. 그리고 계속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오히려 계속 웃어서 좀 무섭긴 했던 거 같아.
한 번은 슈퍼맨 아줌마 뒤를 쫓아다니는 녀석을 본 일이 있었어. 괜히 슈퍼맨 아줌마가 아니야. 얼마나 빠른지, 녀석이 붙잡기 힘들 속도였어. 녀석도 꽤 날랬는데 말이야. 엄마를 쫓는 녀석과 내가 딱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녀석은 고개를 떨구고 부끄러워했어. 녀석에게서 감정이 읽혔던 건 그 순간이 처음이었던 거 같아. 녀석이 그동안 참 힘들겠구나 싶었어. 학교에서도 녀석 주변에서 아이들이 "슈퍼맨 아줌마! 슈퍼맨 아줌마!" 노래 부르면서 짓궂게 놀렸거든.
그러면 녀석은 큰 눈에 힘을 줘서 더 크게 뜰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어. 그때부터였을 거야. 녀석의 편이 돼 주고 싶었어. 친구들에게 슈퍼맨 아줌마는 무섭지 않았다고. 내가 만나봤는데, 웃으면서 사탕을 줬다고 말하고 다녔어.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사탕을 줬어.
사탕효과였을까? 슈퍼맨 아줌마라고 녀석을 놀리던 아이들이 줄더니 관심 밖으로 밀려났어. 다시 짝 바꾸는 날이 왔는데, 좀 섭섭하더라. 그리고 내 짝꿍보다 녀석과 누가 짝이 될지 더 궁금했어. 녀석의 짝꿍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사탕은 말이야. 슈퍼맨 아줌마에게 정말 받았었는지, 상상인지 명확하지 않아. 사탕은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내 마음. 그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