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하나의 외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 있었다.'라는.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아마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대게 누구나 그렇듯 모든 단어에는 그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기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핵심 기억은 평소에는 물속에서 눈을 뜬 듯 흐리게 흘러가다가 우리가 그 단어를 생각하고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 나는 사진작가가 꿈이었다. 지금도 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돈을 벌기 가장 쉬운 방법은 카메라를 파는 것'이라고 할 만큼 세상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는 물론 예전보다 카메라의 보급이 - 정확히는 스마트폰의 보급이 - 활발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평소에 자주 보는 미디어에서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더라도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작가를 꿈꿔왔던 만큼 한때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유명한 사람들의 책도 찾아보고, 주변의 사진을 찍으시는 분들과도 활발히 이야기하며 토론해 보았지만 사진에 대한 생각은 모두가 다 달랐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역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에 관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사람임과 더불어 그가 말한 결정적 순간을 따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겁쟁이 사진가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빌리지는 못 했다. 대신 나는 사진이 '메시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했다.
이 또한 굉장히 진부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은 언어를 초월한 메시지라고도 하지 않는가. 사진 한 장으로 전 세계의 모두가 울기도, 웃기도, 분노하기도 한다. 저널리즘 사진을 생각하면 편하지만, 일단 나는 그런 저널리즘 사진을 찍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따지자면 일상의 모습들을 담는 사람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사진 또한 저널리즘 사진으로도 갈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심오한 곳까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메시지'는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여기 있었다.'라는 하나의 외침 같은 것. 오래된 역사 유적지의 기둥에 보이는 '몇 월 며칠 누구 왔다감'같은, 수많은 낙서들의 사이에 껴 있는 그러한 외침말이다. 나는 사진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나의 사진은 결국 내가 찍는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표현을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 표현이 끝없는 우주의 침묵뿐인 메아리인지는 나는 잘 모른다. 알 길도 없고.
그저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찍고, 그걸 통해 내가 봐 온 세상을 남겨놓고 싶은 것뿐이다. '자 봐라, 내가 본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웠다.'라고. 비록 사진은 찬란한 아픔일지라도 결국 살아있다는 건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대 속, 그날, 그 시간, 그 위치에서 내가 바라본 것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통계학적 불가능을 넘어선 기적과도 같은 그 상황을 나는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통해 나의 존재를 외치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 다만 나는 썩 잘생긴 편이 아니니 좀 더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