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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한손 Apr 09. 2021

술 마시면 180도 변하는 사람

= 소심한 사람

 내 인생 최초로 만난 ‘알코올 반전러’는 우리 아빠였다.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아빠는 술만 마시면 다정해지셨다. 어린 시절 아빠는 술에 취하면 늘 ‘빵빠레’ 아이스크림이 담긴 비닐봉지를 흔들며 집에 오셨다. 까슬한 수염이 자란 얼굴을 내 얼굴에 비비며 웃으실 때면, 밀려오는 큼큼한 냄새에 코를 막으며 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에 싫지만은 않았다.


 그땐 아빠가 술 마셔서 기분이 좋으시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스무 살이 넘어 술에 취하면 평소에 못하던 말들이 줄줄 나오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말없고 내성적인 성격인 아빠가 술의 힘을 빌어 묵혀둔 감정을 표출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그런 아빠의 술버릇을 너무도 닮은 한 남자 동기를 만나게 됐다. 동아리 OT 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 친구는 목소리가 참 컸다. 모두가 어색하게 앉아있을 때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리더십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만난 그 친구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새색시처럼 부끄러움을 타는 생경한 모습에 연유를 물으니 그날 낮술을 먹고 취해 잠깐 변신을 했었다고 했다. 이후 지켜본 그 동기는 무척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술을 먹기만 하면 그 OT 때처럼 변했다. 술에 취해 대담하게 변해있는 친구의 모습은 평소보다 백배는 행복해 보였다.


남편의 알코올 반전


 연애 시절 남편이 술에 취한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다. 애주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그의 작전이었다는 걸,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말이 많고 목소리가 큰 편이었기에 과묵한 아빠나 그 대학 동기와 비슷한 반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남편도 술을 마시면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처음엔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던 애주가와 내가 결혼을 했다니! 게다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빠의 반전 술버릇을 이토록 닮아있다니! 물론 두 사람의 결은 많이 달랐다. 아빠의 경우 딸이었던 나에게 술을 빌어 주로 애정 표현을 하셨던 반면, 남편의 경우 아내인 나에게 평소 말하지 못했던 불만을 꺼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지나칠 만큼 전적으로 내 의견을 맞춰주는 남편은 술만 마시면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적으로 돌변했다. 원래 큰 목소리는 더 커졌고, 말도 더 많아졌으며, 논리적이기가 마치 법정에 선 변호사 같았다. 멀쩡한 정신의 나로선 갑작스럽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으로 달콤한 반전을 주었다면 남편은 거친 반항으로 씁쓸한 반전을 던져준 것이다.


술 마시면 변하는 사람 = 소심한 사람?


 세명의 알코올 반전러들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보며 내가 내린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소심함’이다.  평소 과묵하다가 말이 많아지는 사람, 평소 수줍어하다가 용기 있어지는 사람, 평소 고분고분하다가 반항적으로 돌변하는 사람... 이들 모두 평소 소심한 성격 때문에 표출하지 못했던 진짜 감정을 술에 의지하여 꺼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켜켜이 쌓아둔 감정들로 답답하고 억눌린 게 많았던 사람들이 술이라는 날개를 달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가볍고 홀가분해졌던 기억 때문에 계속 술을 찾으며 애주가가 된 이들은 자칫하면 ‘알코올 의존증’이 될 수 있어 조심할 필요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이 소심한 성격이 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 건강염려증이 있는 우리 아빠는 오래전 “담배 계속 피시면 죽습니다”라는 의사의 한마디에 그날로 담배를 끊으셨다. 술 역시 아직 드시기는 하지만, 나이를 드신 후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드셨다. 우리 남편 또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응급실에 한번 다녀온 이후 술을 멀리하고 있다. 부디 앞으로도 가슴에 쌓인 한(?)을 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가며 소심한 성격을 긍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길.


 혹시 술에 취하는걸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술 자체보다 술 마시면 변화되는 자신에 취해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의 소심한 성격에서 시작된 습관이 아닌지 생각해보자. 술로 스스로를 괴롭히느니 차라리 남에게 ‘막말’을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나은 일이 아닐까?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은 술을 끊는 일보다 쉬운일일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알코올의 늪에 빠지기 전에, 대담해지는 연습부터 하나씩 실천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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