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이름은 없는 사람
야근 후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밤이었다.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향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와 책을 읽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평소라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건만, 엄마와 자는 게 익숙한 아이는 아직 깨어있다. 금세 달려와 안기는 아이의 눈을 보니 다행히 아직 잠이 밀려온 상태는 아니다. 아이의 잠투정이 찾아오기 전 얼른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서 나뒹구는 머리핀이 보인다.
‘휴, 애기 머리는 왜 이렇게 산발인 거지...’
연신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아이가 너무 불편했을 것 같은데... 남편은 왜 머리핀 하나 바로 꽂아줄 생각을 못하는 걸까, 괜히 말하면 싸움만 될 테니 속으로만 생각하고 머리핀을 제대로 꽂아준 후 욕실로 향한다.
옷을 벗고, 몸에 물을 적시고 비누질을 하려는 찰나,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비누질을 하는 내 손길이 번개처럼 빨라진다. 평소 소변을 보려고 잠깐 화장실에 들어갈 때조차 따라 들어오는 아이였기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아이에 대비하기 위해, 그야말로 후다닥 물을 뿌리고 급히 샤워를 마무리한다. 그 옛날 군인들이 한겨울에 찬물만 나오는 군대에서 대충 하는 샤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출동 사이렌을 들은 소방관의 준비과정과 비슷할까? 황당한 상상도 잠시 해봤다. 나에겐 왜 마음 놓고 샤워할 시간도 없는 것일까, 아니 샤워는 둘째치고 왜 맘 편히 볼일 볼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걸까?
어쨌든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고, 하루 종일 내 품과 냄새가 그리웠을 아이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니 내 신세를 한탄할 시간도 없다. 얼른 씻고 나가 아이를 아까보다 더 세게 안아주었다. 역시 아이를 품에 안고 살을 비비는 건 세상에서 가장 충만하게 행복한 일이다. (하루의 피로가 씻어질 만큼은 절대 아니지만...)
아빠와 엄마의 차이
아이의 말간 얼굴을 보고 힐링을 얻고 나니, 그제야 피곤해 보이는 남편의 얼굴이 보인다. 사실 최근 몇 주간 야근을 지속해온 남편이었다. 안쓰런 마음이 들려는 찰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이 야근을 했던 지난 몇 주, 난 육아를 홀로 수행해오지 않았던가? 퇴근 후 아이 픽업부터 목욕, 저녁 식사, 이후 놀다가 잠이 들 때까지... 모든 건 내 몫이었다. 남편은 야근하는 날이면 집과 철저히 분리가 되었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의 잠만 잤다. 야근 후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느라 아주 늦어져 아이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지나간 날도 많았다. 그런데 왜 나는 야근을 하고 와서도 남은 육아 근무를 이어가야 하는 걸까? 남편은 왜 혼자 아이를 재우지 못하는 걸까? 심지어 야근하는 어떤 날엔 남편이 야근하는 나의 회사 앞으로 아이와 함께 찾아와 급히 일을 마무리한 적도 있다. 어쩜 내겐 야근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란 말이더냐!!!
일하지 않는 전업주부 엄마라면 좀 괜찮을까? 1년의 육아휴직을 하며 내가 느낀 건 ‘NO’다. 물론 그땐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았기에 더 힘들었지만 전업주부인 엄마가 워킹 맘보다 더 편하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나의 경우 종일 집에서 아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우울감이 더 컸고, 남편에 대한 불만도 더 컸다. 내가 벌어 내가 쓰던 소비 습관에서 벗어나 남편의 수입이 의존해야 하는 것도 너무 빠듯하고 불편했다.
남편 역시 내가 일하지 않을 때 ‘아내는 집에서 편하게 있다’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어 육아나 집안일에 참여하는 정도도 줄어들게 되는 것 같았다. 둘 다 사회생활을 하며 육아를 하며 동등하게 업무를 배분하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훨씬 공정하고 진정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싸우는 일도 오히려 줄어들고 말이다.
엄마라는 이름의 사람 = 내 이름은 없는 사람?
엄마가 아이에게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빠보다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임신하는 순간부터 엄마의 역할은 아빠보다 크다. 함께 보낸 10달의 시간 때문인지 아이 또한 본능적으로 엄마를 더 좋아한다. 마치 ‘엄마사랑 일정량의 법칙’처럼 아이들에겐 엄마로부터 채워져야 하는 시간과 애정의 양이 정해져 있는 느낌이다. 고로 엄마는 내 시간을 갖기가 힘들고, 워킹맘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남편이 전업주부인 아는 언니의 경우, 주말이면 아이들이 엄마에게 매달려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고 한다. 아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단다. 엄마라는 게 너무 힘들지만 아이가 이런 뜨거운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또 서운하지 않을까?
셋째 딸이었던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엄마 등에 업혀 다녔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엔 엄마가 잠시 집 앞 슈퍼에만 가도 따라나섰다. 엄마는 집에 있으라고 하셨지만, 아들이 없는 엄마에게 아들 노릇을 해주겠다며, 무거운 것을 들어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기어이 따라나서곤 했다. 그땐 엄마가 나를 귀찮아 하리라고는 1도 생각하지 못했다. 1분 1초라도 엄마 옆에 붙어있고 싶은 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란 사실을 안 건 무려 3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엄마가 되어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게 된 후부터다. 그걸 깨닫고 엄마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하지만 이제 혼자만의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져 외로울지 모를 엄마와 오히려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 얼마나 미안하고 죄스러운지...
엄마의 사랑을 생각하니, 내가 엄마라 힘든 시간들은 그에 비하면 참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나 때문에 이름이 사라졌을 엄마의 그 소중한 시간의 희생으로 나라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게 된 것처럼, 내 이름이 흐려진 시간 속에서 우리 아이 또한 인간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