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음 Oct 03. 2024

[자매성장소설] 02.다정

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오기







2.다정




이정표.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지은 우리 집 이름이다. 다정이와 호정이, 두 명의 정이들이 사는 ‘표’ 자를 닮은 2층짜리 우리 집. 말 그대로 내 삶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그때도 그랬다.


스물다섯 살, 일성기획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했다. 이제 내 인생엔 퐁신한 마시멜로우 색깔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웬 걸, 달궈진 냄비 바닥처럼 새까만 나날들이 계속됐다.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틀 밤을 꼬박 새 만든 카피가 5분 만에 광고주 입맛으로 전면 수정된 날이었다. 아이데이션한 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자리에 앉아 카피라기보단 고루한 제품 스펙 설명서가 되어버린 안을 허망하게 바라봤던 그날, 나는 어딘가 고장 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런 식의 결과는 3년 차가 돼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 카피가 어설펐던 걸까, 내 설득이 부족했던 걸까’ 입사 초기엔 화살을 나에게 돌렸지만 머리가 어설프게 자라버린 그때엔 그냥, 모든 게 싫었다.


도망치듯 회사를 나와 역으로 향했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내내 택시만 타다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눈에 활자를 더 이상 집어넣고 싶지 않아 휴대폰은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할 게 없어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했다. 하루 중 머리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이 시간, 뭉게뭉게 칸 안 가득 매캐한 생각의 구름들이 차올랐다. 꼴을 보니 비가 올 모양이었다. 퇴근길 각자의 고민들이 무거워 한바탕 소리 없이 쏟아낼 모양이었다.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몸을 뉘었다. 하루를 겪고 온 무거운 머리를 베개에 덜어내고, 사소한 말들이 새겨진 심장은 이불로 가려줬다. 떼어둔 힘이 걱정됐지만 내일 아침에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 억지로 믿으며, 그저 오늘과 내일을 이을 자세를 하고선 눈을 감았다.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떠 내 방구석구석을 관찰했다. 나를 울린 소설들, 나를 웃게 한 그림들, 나를 살게 한 일기장들, 그리고 방 밖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 평생 이정표가 되어준 이곳 우리 집 내 방에서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잘하고 싶은 것들은 타인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걸. 온갖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힌 조직 안에선 진짜 내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어느새 머릿속엔 한 문장만이 가득 차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렇게 회사를 나왔다.

나는 2년 차 웹툰작가 지망생이다.


이정표, 우리 집은 내게 이정표다. 길을 잃었을 땐 묵묵히 옆을 지켜주고 다시 방향을 잡고 싶을 땐 해답을 알려주는. 그런데 이 집을 떠난다고? 이 집을 판다고?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된다. 모두 그냥 하는 소리일 거야.


일단 붙자. 9월에 있을 공모전에. 그러면 저런 불안한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도 않겠지. 다들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걸 거야. 호정이는 천둥이 귀에 매달려도 아랑곳하지 않을 애지만, 난 입바람에 날리는 홀씨만 봐도 마음이 폭풍처럼 요동치는 애니까. 어서 강해지라고 괜히 하는 말일 거야. 그러니까 어서 데뷔하자. 걱정 그만 끼치고 자리를 잡자.


그래서 지금처럼 이 집에서 살자.

다 같이 행복하게.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2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