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집밥의 시그니처는 '갈비찜'이다. 두 번 가면 한 번꼴로 밥상에 올라온다. 신혼 때 워낙 잘 먹는 내 모습에 반했다고 고백(?) 해주신 어머니.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많지 않아 언제나 잘 먹는다. 가기 전에 속만 비우고 가면 되니까.
갈비찜에 따라 나오는 걸쭉하고 매콤한 잡탕찌개, 파삭하게 단 고추튀김, 짭조름하게 무친 고춧잎, 손수 담그신 양념게장, 쫀득 고소함에 물컹한 느낌이 잘 어울리는 고추 멸치볶음, 칼칼하게 속 시원한 물김치, 씹으면서도 달달한 침이 입속 가득 고이는 배추 겉절이, 겉절이 같이 살아 있는 부추무침, 아삭하고 투명한 무채, 귀청 크게 씹히는 무말랭이.
어머니 집밥은 늘 오곡, 육곡의 잡곡밥이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정기적으로 사다 놓으시는 잡곡이 집안 가득하다. 병아리콩, 완두콩, 쥐눈이콩, 팥에 좁쌀, 귀리, 보리, 현미. 가짓수를 셀 수도 없다.
자고
한참을 뜯고 씹고 나면 재우신다. 안 그래도 졸리는데, '가기 전에 좀 쉬어'를 연발하신다. 어떨 때는 역정까지 내실 듯하다. '아, 사람. 뭘 그렇게 참아.' 하시면서. 그럴 때마다 꼭 잠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시지 싶어지기도 한다.
내내 내 얼굴을 챙겨 보신다. 그러다 슬쩍 거실 조명을 끄신다. 보시던 텔레비전 볼륨을 속삭이게 만드신다. 거실 한가득 어둑해진다. 한낮에 암막 커튼으로 창을 다 가린 듯. 안 졸릴 수 없게 만드신다.
아내와 아이들은 거실 바닥에서 자고. 뜯고 씹을 때보다 잘 때 더 위로가 된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렇게 먹고 잘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이 나만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두 분은 주무시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스물네 해 동안 몇 번 되질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미리 자면 밤에 잠을 못 주무신다고. 자도 자도 자는 나는 이해가 되질 않지만. 그런데 그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달고
43년생이신 장인어른은 보청기를 끼고 계셔서 화난 것처럼 목청이 크다. 그런데 나에겐 그 외침이 위로가 된다. 같이 앉아 있는 내내 "사람, 참. 바쁜 데 왜 왔어?", "애들은 잘 지내?", "길 막히는데, 어서 가!", "어휴, 또 언제 가냐" 하시는 게 말씀의 전부이지만.
잘 안 들리는 귀보다는 여전히 또렷하신 시선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시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방직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일찍 귀가 들리지 않으셨다.
"윤 서방, 커피 마셔?"라고.
한숨을 자고 일어나면 장인어른이 준비해 주시는 마지막 의식이다. 안 막히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도, 언제나 '먼 길'이라시며 커피를 마시자 하신다. 물론, 노란 커피다. 장인어른이 손수 타주시는. 그렇게 일 년에 몇 번 노란 커피를 마시게 된다.
우리도 스물이었었다
두툼한 두 개의 앨범 속에는 스물둘, 열아홉의 양관식, 오애순이 세상 행복한 흑백 미소로 수줍게 웃고 있다.
스무 살 손녀가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며 아이돌 커플이라고 감탄하는 연인으로 남아 계신다.
그 덕에 돌아오는 길이면 언제나 달빛, 별빛이 우리 둘만 비추이는 듯 오애순의 <금명>이 남편이 되어 본다.
바당이 30년 넘게 근무했던 거대한 방직기계가 즐비한 공장이었고, 전복과 조구가 평생 볶고 구어냈던 북적한 시장통 한 귀퉁이의 백반집 제육볶음이고 고등어였을 그들의 전쟁터, 놀이터, 사랑터. 부모는 청춘 대신 받는 훈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이 두 손 꼭 잡고 앞서 걸어 나가시는 뒷모습만 봐도 그냥 행복해진다. 사는 맛이 다시, 일어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잘 싸워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싶어지기까지 한다.
아내가 엄마 메밀배추 전에 중독되었듯, 나도 어머님의 갈비찜에, 장인어른의 노란 커피에 중독이 더 심해져 가는 이유다. 부모 앞에서 부모이지만 또 자식으로 남아 있다는 느낌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큰 행복이다. 부모도, 우리도 같이 경외롭게 폭싹 속아 왔고 속고 있구나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