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신호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길게 보도블록이 깔려 있다. 원래 그 길은 흙길이었다. 흙내음을 맡기에는 좋았지만 궂은날엔 푹 빠질 정도로 걷기가 힘든 구간이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는지 작년에 새 단장이 되었다. 게다가 울퉁불퉁하던 길이 곧게 뻗었다 끝부분 벤치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휘어지는 길로 바뀌었다.
휘어진 길로 접어들면 오른쪽에는 주르륵 보도블록이 여전히 깔려 있지만 왼쪽 개울에 맞닿은 둔덕은 평평하게 다진 흙길이다. 원래는 비탈처럼 블룩 한 형태에 덤불이 우거져 길이 아니었다. 공사를 하면서 원래 길에 있던 흙을 퍼 날라 쌓으면서 거기에 황토 흙을 더 갔다 부어 평평하게 다져 길이 되었다.
휘어지자마자 가만히 서서 저 멀리 앞쪽을 바라본다. 왼쪽 눈 안에는 흙길이, 오른쪽 안에는 우뚝 솟은 아파트 덕분에 더 푹 꺼진 듯한 아늑한 보도블록길이 한참을 뻗어 나가는 풍경이 눈에 동시에 들어온다. 한 50여 미터쯤 곧게 뻗다 다시 11시 방향으로 살짝 꺾이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 길을 맨발로 걷는다. 나도 따라 걷는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하천 쪽으로 주르륵 서 있던 나무들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덤불 사이사이에서 원래 그렇게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나무들이다. 내가 지금 동네에 살면서 산책을 하기 시작한 것도 십 년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대부분은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들이다. 그 사이사이에 왕벚나무들이 홍일점이다. 한두 나무를 빼곤 모두 다 자기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하늘에선 가지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데, 수종별로 모여 있지는 않고 뒤섞여 서 있다. 그 아래에서 나무들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성한 나무들이 없다. 꼿꼿하게 서 있고, 푸른 잔솔들이 풍부하지만 아랫동은 상처 투성이다. 껍질은 거칠게 메말라 있다. 중간쯤에서 두 세 갈래로 갈라진 가지중 한 두 가지는 잘려 나갔다. 누가 자른 게 아니라 나무가 제 가지를 뻗다 말은 옹이들이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살아남은 가지들은 단단하게 생생하다. 11시 방향으로 꺾이는 부분에서 멈춘다. 그 길의 중심인 듯하다. 우리 동네, 아파트 숲 사이에 이런 나무가 있었나 싶다. 낯선 발견이다.
주변 나무들과 달리 눈에 띄게 키 크고 높게 뻗어 당당해 보이는 플라타너스다. 안쪽에 있는 나무가 좀 더 굵다. 안아봤다. 내 가슴에 다 들어온다. 왼쪽 손바닥으로 오른손 손목을 잡을 정도로 굵다.
그 나무를 왼쪽, 오른쪽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거칠다. 손의 온기가 다 빼앗길 정도로 차다. 나무 표피가 다 벗겨져 위아래 방향으로 들떠 있다. 이미 떨어져 나간 곳에서는 바닐라색 아기 껍질 같은 새살이 탈피한 매미집처럼 보들거린다. 어젯밤에도 조금 자라났나 보다.
가만히 손을 펼쳐 대고 눈을 감는다. 손바닥 가운데에서 나무의 온기가 느껴진다. 나무 안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자글거리는 듯, 웅얼거리는 듯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대지에서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리느라 분주하다. 중력을 거스러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이다. 봄은 중력을 거스르는 생명들의 용솟음으로 채워진다. 나무들의 생명을 향한 의지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저항과 극복이다. 많은 제약 조건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다. 멈추지 않는 성장과 발전이다. 삶의 의지를 잃지 않으려는 생명력과 희망이다.
나무는 동사다. 움직이지 않지만 언제나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태어나고, 생겨나고, 솟아오르고, 자란다. 나무는 태어'남'의 나무이다. '남'은 솟아 오르다, 서서 있어 나무다. 내가 태어나기 전 태어나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나를 기억해 줄 동사다.
나무들도 어느 해 어느 봄날 새싹으로 태어났다. 수많은 겨울을 보내면서 봄을 기다렸다. 매번 중력을 거스르며 솟구쳐 올라 지금이 되었다. 지금도 거스른다. 거스르느라 얼마나힘이 들까 하고 생각해 본다.
햇살아래에서도 달빛 아래에서도 비바람 속에서도. 눈에 파묻혀서도 얼음에 둘러싸여서도. 그렇게 나무들은 그 자리에서 세월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십 년의 눈물과 희망, 미소와 불안의 소리들을 다 간직하고 있다.
떡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덕분에 나-세상 사이에서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것들이 꽤나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무들이 그러듯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어제 같은 생명력을 지켜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