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요, 불. 불이 났어요. 진짜로 불이 났어요"
아파트 21층. 자신의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답니다. 밤 10시 반쯤이었을 때.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는군요.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밖에서 뭘 태우나 싶어 친구들과 하던 게임에 몰두했답니다.
그런데 고무 타는 냄새가 더 진해져서 이내 발코니 창 밖으로 아래를 내다봤다네요. 그랬더니 맨 아래층 어느 집 거실 창 밖으로 벌건 불길이 이미 새어 나오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먼저 주무시는 아빠를 깨우고 무작정 바깥으로 뛰어 나갔답니다.
그렇게 자신의 집 21층에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는군요. 계단으로 한 층 한 층 뛰어 내려가면서 세대마다 문을 두드렸답니다.
" 우리 아파트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셔서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냥 뛰었습니다."
엊그제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우리 반 아이, 주니 이야기입니다. 그러는 동안 아빠는 이미 위아래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어르신들을 엎어 이동시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내려오는 동안 소방차가 도착을 했고, 발화지점인 2층의 불이 다른 세대로 번지지 않도록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는군요.
1층 바깥으로 나온 주니는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향했답니다. 원래 심하게 운동을 하면 과호흡이 있어 주의하던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어제 상담에서 하루 입원했다 퇴원을 할 정도로 몸 상태는 문제가 없었다고 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싶었습니다.
"아, 정말 그게 너였다고?"
작년 2학기 어느 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체 메시지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미담 사례'라면서 시작된 신문 기사의 링크였죠. '참 대단한 아이가 있구나'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상담하다 말고 주니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주니. 왜소하지는 않지만 다부지지 않은 체형인 주니가 저에게 감동을 준 건 그다음에 저에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십대들에게 '꿈이 뭐냐' 물어보면 지금도 여전히 십중팔구는 단박에 특정 직업을 꺼내어 놓습니다.
직업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현실이죠. 꿈 너머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나눈 적도 많지 않아서 그렇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바로 '먹고사는'데 꿈이 몰려 있다는 것일 겁니다.
일단, 먹고사는 게 해결이 되면 그때 가서 그다음을 생각해 보면 되니까,라고 우리도 그렇게 달려왔지요. 하지만 우린 잘 알고 있잖아요. 정말 잘 사는 데는 '꿈 너머 꿈'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게 결국 '어떤' 사람으로 살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교사, (어떤) 경찰관, (어떤) 의사, (어떤) 간호사, (어떤) 판사, (어떤) 검사, (어떤) 음악가, (어떤) 작가, (어떤) 아빠, (어떤) 남편, (어떤) 사람.........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연결되게 되는 것이고요.
이 '어떻게'가 없으니 자주 '어떻게, 어떻게' 하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나부터 나를 믿지 못한 어른으로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떻게'사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어른들을 자기 생활 반경에서 접할 수 있는 경험이 부족한 이유겠다 싶습니다.
다행히 주니는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을 계기로 꿈 너머 꿈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소방관'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응급실에서 나온 뒤 수개월 동안 헬스장을 다니고 있으면서 '소방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해맑게 웃음 짓는 주니 얼굴을 보다 보니 불현듯 한 은퇴 소방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지방 소도시의 한 적한 곳에 자리한 카페 사장님 이야기입니다.
일 년에 10만 명이 넘게 방문한다는 이 카페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탄 계기가 조금 색달랐습니다. 얕은 언덕을 끼고 자리 잡은 카페 건물을 들어가는 통로가 미로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 싶어 걷다가도 다른 방향의 길을 택해야 하는 번거로울 수 있는 진입로를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죠.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은퇴 소방관이었던 건축 의뢰인은 젊은 시절, 모든 입사 시험에서 낙방을 하다 그냥 '여기도 될까?'하고 넣은 소방공무원 시험에 덜컥 붙었던 것이죠. 그렇게 30년이 넘는 시간을 소방관으로 살았던 겁니다.
'원하는 길과 운명의 길이 엇갈렸던 것 같다'(주1)는 의뢰인의 말이 건물 설계에 반영된 결과가 '미로'같은 진입로라고. 1분이면 올라갈 언덕을 일부러 20분에 걸쳐 길을 돌아 오르면서 꽃밭에서 향기도 맡고, 길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도 만날 수 있게.
주1> 백희성, 킵 건축사무소 건축가, 롱블랙인터뷰에서
은퇴 소방관이 전해주는 지혜를 주니는 알지 못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들어설 길에 확신을 갖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불완전한 존재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아기 천사가 보였습니다.
주니 덕분에 저도 제 꿈을 스스로 한번 더 응원해 보았네요.
'어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만 있다면!'
내게 공부란 그런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로, '타자'의 보호 없이 는 생존조차 위태로운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하나 나의 불완전한 부분을 채워가는 것. 그렇게 자연과 세계와 사물들을 이해하며 전인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나의 공부이다.(주2)
주2> 김열규, 공부, 2010, 바이북
https://blog.naver.com/ji_dam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