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함께 술잔을 나누시던 아버지가 불쑥 말씀하셨다.
"니하고 내하고 이래 볼 날이 몇 년이나 되겠노?"
이 말을 불쑥 건네시던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지도 않았고 슬퍼하는 느낌도 없었다. 남의 이야기처럼 그저 덤덤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덧 아버지의 연세는 66세이다.
평소에 건강한 체질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시다 보니 어느덧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아버지는 기관장이셨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보는 날은 일 년에 한두 달 정도였다. 컨테이너를 싣고 머나먼 바다를 돌고 나면 8개월에서 1년 만에 겨우 한 달 남짓한 휴가를 받으셨다.
아버지 눈에 나는 콩나물처럼 훌쩍훌쩍 커버렸던 모양이다. 늘 배에서 다녀오시면 볼 때마다 '언제 이래 컸노?'라고 습관처럼 말씀하셨으니까.
나에게 아버지는 1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특별한 손님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와 나만 존재하던 보금자리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반가운 객.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반가운 존재이면서도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어색함이 흘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낯선 기류가 흐른다는 게 마땅치 않으셨는지 꼭 둘을 붙여놓으려고 했다.
아버지가 어색함을 풀기 위해 늘 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어릴 때 과자 하나 손에 쥐여주면은 좋다고 졸래졸래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 갔더니만 언제 이렇게 컸노!'라는 멘트다. 이 말은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시작해서 내가 태어난 지 38년째인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계신다.
레퍼토리는 또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던가, 그때까지는 월세를 전전하던 때였는데 전세로 옮기기 위해 방을 내놓는다는 벽보를 붙이러 다닐 때였다. 그 때는 월세가 뭔지, 전세가 뭔지 그 개념도 잘 모를 때지만 벽보를 붙이러 다니는 모습이 창피하다는 생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 집 근처까지 와서 전봇대에 벽보를 붙이고 있을 때 하필이면 친구 집에서 친구 어머니와 친구가 나왔다.
나는 다급히 아버지와 멀찍이 떨어져 일행이 아닌 척 숨어버렸다. 그 모습을 멋쩍게 지켜본 아버지는 두고두고 서운하셨는지 술이 얼큰하게 되시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신다. 아버지도 농담으로 하시는 거고 경상도 말로 시근이 없어서 그랬단 것도 다 아시지만 아버지의 이 레퍼토리가 농담만으로 들리지 만은 않는다.
난 아직 아버지가 되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이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 상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아버지와 소주 한 잔을 나누는데 아버지가 그러셨다.
이상하게 지금도 너를 보고 있으면 어릴 적 방에서 혼자 장난감 가지고 놀던 그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고.
이제 마흔이 가까워지는 나이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아버지께 웃음 섞인 핀잔을 주며 민망함을 털어 버렸다. 아버지는 이어 말씀하셨다.
1년마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니 내가 볼 때마다 훌쩍 커 있었다고.
그래서 달라진 내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어색하고 중학교 이후 들어서면서 내가 말도 별로 없어지자 아버지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사실 그랬다.
아버지를 싫어한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던 오붓한 세계의 정적을 깨는 멀리서 찾아온 어색한 손님, 아버지도 그런 내 속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계셨던 거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참 많이도 다녔다.
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8개월 동안 거대한 바다 위의 감옥에 있다 보니 그리운 우리나라 산천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이고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아버지가 한국에 휴가만 오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정답이건 우리 모두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여행가는 것을 참 좋아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산과 들, 계곡과 조용한 사찰, 시끌벅적한 시골장터, 이 모든 곳이 우리 가족에게는 추억이 깃드는 공간이었다. 좁은 방안에 몸을 부대끼며 자는 것도 불편하기보다는 세 식구가 함께 체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든든한 의지처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나 둘 사이는 왠지 모를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을지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고 공유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서로 간에 애틋함을 느낀 것은 어쩌면 우리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의 공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병이 있던 어머니의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다가 의식을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담담해 보였다. 어머니가 입퇴원을 반복할 때도 아버지는 현실적인 병원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어떻게든 살려보려던 내 노력과 달리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우주의 따뜻한 안식처로 가족의 의미를 느끼고 있었던 내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하루를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판정을 듣고 나서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마지막 세상에서의 새벽을 맞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어머니의 체온을 기억하기 위해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병원의 복도로 나갔다가 복도 끝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흐느끼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등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구슬퍼보였다. 아버지는 그동안 가장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슬픔조차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채 억누르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마음을 함부로 판단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내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가면 뒤에는 상처받고 슬퍼하는 여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독립해서 지내기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뵙는 것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다.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예전보다 더 친밀해진 것을 느낀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가교가 없지만 아버지와 단둘이 있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아버지를 더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서로를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애틋함이 생겨서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지는 모른다. 어느새 아버지의 이마와 눈가에 생긴 주름, 예전보다 술도 많이 못 드시는 모습들을 보면 니랑 내랑 얼마나 보겠노?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냥 농담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라는 꼬리표를 단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의 순간순간을 기억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술 한 잔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