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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e Oct 07. 2024

이터널 선샤인

Schubert Impromptu Op. 90, No.1

지금은 함께하지 않는 옛 인연을 떠올리면 고마운 마음이 들고 좋았던 순간이 먼저 떠오른다.

왜 멀어졌을까 좋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장 나중에 생긴 일인데도 기억하는 데 한참 걸린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겠다며 한 시절을 떠나보내던 내가 보인다.


실연이 고통스러워서 기억을 통째로 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과 관련한 모든 물건을 모아 기억 회로를 만들어 내가 잠든 하룻밤 동안 전부 삭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이 그랬다.


이별을 견디다 못해 홧김에 연인에 대한 기억을 지운 클레멘타인, 그녀를 따라 자신도 기억을 지우게 된 조엘.

작업을 위한 수면 상태로 들어가 최근 기억부터 거꾸로 지워가는 작업이 순조롭게 시작됐다.

잦은 다툼으로부터 기억을 거슬러 올라 행복한 시절로 접어든다.


어느덧 그녀와 함께 모든 것이 완벽했던 순간에 다다르고

겨울밤, 아무도 없는 꽁꽁 얼어붙은 강에 둘은 나란히 대자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

“지금 죽어도 좋아”

“이런 기분 처음이야”

“이런 순간을 늘 꿈꿔 왔어”

“비로소 내 자리를 찾았어”


다신 없을 행복했던 순간이 지워지려 하자 조엘은 이 기억만큼은 남겨달라고 기억을 지우기 싫다고, 심지어는 다 취소해 달라고 미동도 없이 감은 두 눈 속에서 외치고 애원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만나기 전, 그녀에게 언급한 적 없던 기억으로 냅다 도망치기까지 하자 장치에 오류가 나기도 한다.


그는 이미 끝난 사람과의 기억을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을까?

아직 잊지 못해서? 다시 잘 될지도 모르니까?

죽어도 좋을 만큼 더 없는 행복, 가장 크게 동요한 순간, 내가 가장 내가 되는 경험.

가장 인상 깊은 행복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 강 위에 누워 너와 나의 경계는 허물어졌을 것이다. 너는 나를 경험한 또 다른 나다.

상실이 고통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나였던 이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만 부여한 내 존재의 일부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를 탠저린이라 부르던 사람이 사라지면 나는 더 이상 탠저린일 수 없다. 너를 잃음으로써 나는 네 것이었던 나와 이별해야 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잃고 나 자신을 잃은 듯한 고통에 모든 기억을 지우려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것이야 말로 나를 잃는 것이었다. 강렬했던 행복의 기억, 그녀는 이미 나 자신이 되어 있었다. 그 짧은 행복은 모든 괴로움을 차치하고라도 지켜야 할 것이었다.



다시 지금의 나를 본다.

행복이 가장 힘이 세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결말보다 고마움이 먼저 기억났나 보다. 떠난 이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차라리 모르고 살았을 것도 안 될 일이었다. 나를 울게 한 시간이 곧 나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바보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진정한 내가 깨어나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은 얼마든 감수해야 할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하고 그 순간을 그리워하며 그 순간에 삶의 이유가 있다.


나를 알고 너를 알고 행복의 순간을 늘려가며 삶이라는 총천연색으로 우리를 채운다면

두려움 없이 활짝 핀 영혼으로 모든 걸 사랑할 수 있겠지.


Schubert: 4 Impromptus, Op. 90, D.899 - No. 1 in C Minor: Allegro molto moderato


슈베르트 즉흥곡 Op.90 No.1은 딱 한 번 행복하다. (조를 바꿔 한 번 더 나오긴 하지만)

헌데 그 짧은 행복이 강렬하게 아름다워서 마음에 박혀버리고 만다.

부드러운 거대한 파도가 가슴을 삼키고 지나가는 듯한 행복.

그 순간을 위해 긴장하고 탄식하다 희망을 보며 이윽고 짧은 행복에 도착하고는 이내 소멸한다.

파도가 지난 자리엔 파도의 흔적만 남는다.

사랑이 지난 자리엔 사랑의 흔적만 남는다.


나의 이터널 선샤인

찰나, 그러나 가장 강한 행복한 기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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