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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Jul 05. 2024

봄이 오면 고사리 스테이지가 열린다

“법우들, 고사리 꺾으러 가자!“


아침 7시쯤, 공양(식사)이 끝나고 한숨 돌리고 나면 보살님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사리는 해가 쨍쨍하면 잘 안보여서 이른 아침에 가야한다. 봄이 되면 절은 점점 바빠진다. 뜯어야 할 봄나물이 늘어간다. 특히 고사리밭은 워낙 넓고 잘 자라서 부지런히 꺾어야 한다.


긴 바지 두 겹, 긴 팔에 외투, 팔토시, 장갑 끼고 밀짚모자에 장화까지 신으면 준비 끝.


대나무숲을 건너가면 고사리밭이 나타난다. 고사리 밭은 총 3곳으로 각 밭의 느낌이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다.


1번 밭에 있을 때면 예전에 방송된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편’이 떠오른다.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석양을 바라볼 때 혁오의 <공드리>가 BGM으로 깔렸다. 타임랩스로 찍힌 영상엔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기린이 지나갔다. TV로 봤지만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1번 밭에선 가지각색의 새소리가 가장 많이 들린다. 지리산 자락 근처인 이 곳엔 천연기념물도 많다고 했다.

절에서 걸어서 5분이지만, 겨우 몇 미터 멀어졌다고 듣지 못했던 새소리와 동물소리가 들린다. 이제 여기서 발견하는 고사리는 게임 속에서 아이템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풀이 우거져 깊이 들어갈수록 정글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아기들 손보고 고사리 손 같다는 말, 이젠 완전 이해가 된다. 고사리는 정말 아기들이 손을 웅크린 것처럼 생겼다. 웅크린 모양에서 꺾지 않으면 고사리는 금세 활짝 핀다. 활짝 핀 고사리는 예전에 교과서에서 본 고사리 화석과 똑같다. 또, 고사리 하나를 발견하면 안 보이더라도 옆에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면 초록색 사이에서 고사리가 보인다. 고사리는 군집식물이라 한 곳에 우르르 몰려있다. 하나를 꺾었으나, 주변에 다 핀 고사리만 몰려있다?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다.


고사리는 찾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꺾는 건 너무 쉽다. 고사리를 잡고 가벼운 손목의 스냅으로 똑 뜯으면, 질기지 않은 부분에서 끊긴다. 힘으로 끊으려다 보면 질긴 부분까지 따라온다. 고사리가 '여기까지'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고사리가 길다고 욕심에 밑에 부분을 뜯으면, 너무 질겨서 씹기 힘들고 이 나간다.

다 똑같은 초록색처럼 보이지만, 움켜쥔 듯한 모양의 고사리는 의외로 한 눈에 들어온다.

한참 꺾다 어두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면 나도모르게 풀숲으로 깊게 들어가 있다. 1번 밭은 워낙 우거져서 정글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꺾고 나면, 2번 밭으로 이동한다.


2번 밭은 나무가 많다. 2번 밭엔 모자가 나무에 걸리기 쉽다. 1번 밭과 2번 밭의 난이도는 비슷하다. 별 3점 정도. 잡초도 많이 자라니, 보살님들은 낫을 들고 다니면서 잡초를 베고 쑥과 고사리를 같이 뜯을 때도 있다.


처음보면 내 눈엔 그냥 풀밭이지만, 사실 여기가 완전 노다지. 먹을 풀이 너무 많다. 절에선 산과 들이 하나로마트의 신선식품코너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 중에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이하 젤다)이 있다. 그 게임에 한창 빠졌을 땐 주말 이틀을 잡고 하루종일 '게임데이'를 만들어 그것만 했다. 그 게임의 매력은 자유도다. 젤다는 메인 미션이 있긴 하지만 꼭 하지 않아도 된다. 단역이나 조연 NPC들과 얽힌 작은 에피소드와 관련된 미니 챌린지를 하거나 주인공 링크의 능력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거나 몬스터만 잡거나 채집만 해도 된다. 특히 미니 챌린지 중에서 '개구리 20마리 잡기, 메뚜기 20마리 잡기, 닭장에 닭 넣기' 등 미션들이 있다.

그런 미션이나,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 채집을 할 때면 '동물의 숲' 못지않다. 고사리 꺾을 때 '젤다의 전설'의 세계에 내가 들어온 기분이다. 살금살금 밭을 기어가다가 +고사리 1 할 때의 쾌감이란!


여기서, 절이란 특수한 환경이 추가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사리가 잘 발견될 때는 '고사리를 찾아야지'라는 마음의 집착을 가질 때 보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면 어느새 수두룩하게 모여있는 고사리 떼가 보인다.

나무가 울창하지만 1번 밭보다 잘 보일 때가 많다.


보통 고사리 뜯으러 갈 땐 밭을 1-2개 정도 골라 간다. 세 밭은 다 가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힘도 든다. 고사리 뜯기 좋은 피크타임인 아침 7시~8시 30분이 지나면 해가 떠서 초록색이 구분이 안 간다. 고사리가 잘 안 보여 난이도도 올라가고 더워서 지치기 쉽다.


그래서, 마지막쯤에 3번 밭에 가면 능률이 올라간다. 난이도 별 1-2개. 3번 밭은 평지에 잡초도 높이가 낮은 것들만 난다. 발견하기도 쉬워 초심자에게도 재미 붙이기에 좋다. 게임으로 치면 점수를 거저 주는 '피버타임' 같달까.


3번 밭에서 모두 정신없이 고사리를 뜯고 있다.


고사리는 4월부터 6월 초중순까지 뜯는다. 6월로 들어서면 줄기가 가늘어진다. 고사리가 얇아질수록 여름이 오늘 걸 느낀다. 포대에 고사리 한가득 채우고 오면 가마솥에 바로 고사리를 삶는다. 삶은 고사리는 볕에 바짝 말리면, 우리가 아는 갈색의 고사리가 된다.


고사리를 먹기만 했지, 절에 살기 전까진 따보지 않았다. 고사리를 꺾으면서 쾌감과 성취감을 얻는다.
사회에선 늘 성취감에 목말라 있었다. 데이터로 성과를 증명하고 나의 프로젝트 기여도를 증명하며 나의 급여보다 내가 더 많은 성과를 갖고 오는지 늘 어필해야 한다.


고사리를 꺾을 땐, 손톱만큼 꺾어와도 일용한 양식에 스스로 기쁨을 얻고 서로에게 고생했다는 인사, 그뿐이다. 고사리 밭에서 얻는 성취는 불안감을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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