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에 대하여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모순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데 냉랭하게 대하는 애인, 내가 보고 싶지만 연락은 하기 싫고 나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건 하고 싶은 애인, 나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나한테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별로인 것을 내놓는 애인을 겪어야 하는 대목이 연애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인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 내면에 어떤 추동이 일어나서 나를 좋아한다는 게 돌연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실이 된 건지, 나는 그것을 당하는 입장일 때도 어리둥절하고 반대로 내가 그런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갑게 대할 때도 내 마음이 왜 갑자기 지랄난걸까 괴로워한다. 내가 이런 마음이 될 때면, 즉 내가 나의 염병을 이해할 수 없을 때면, 나는야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유별난 사람이지롱 같은 인간미 없는 캐릭터 설정에 빠져 그 순간을 피하기도 한다. 모순이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세상에는 모순이 있다 라는 그 사실 자체로 받아 들여져야 하는 것인데 마음이 유약하여 불안의 원인을 찾아 내 눈앞에 보이지 않고서는 끝내 불안한 나로써는 이 부분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자기 모순적인 순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 또한 상대를 한없이 좋아하는 맑은 마음이었다가 문득, 아무런 이유도 사건도 없이 그 사실이 나 자신을 멋쩍게 만들 때가 있다. 맑은 표정으로 기뻐하던 나 자신을 마치 제 3 자가 보는 것처럼 객관의 액자 속에서 발견하게 될 때, 그런 내 모습을 내가 보고 있기가 힘들달까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 다는 말처럼, 진정으로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는 나 자신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온 행복을 누리느라 정신을 다 뺏겨서, 내가 나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 긴장된 상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그 순간이 진정한 기쁨의 순간이다. 근데 시간이 지나 그 순간을 회고할 때, 내가 나 자신도 잊고 즐거워했다는 게 행복의 증거처럼 느껴져 편안할 때도 있고, 그런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 건지는 아직 연구 과제다.
내가 방심하고 기뻐한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지면, 나는 열정을 쏟아내던 마음을 얼른 정리하고, 침착하고 단정한 태도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동안 방심한 내 모습에 대해 세상과 나 자신에게 변명을 하듯이
맑은 마음으로 기쁨을 누리던, 세상에 무방비하게 내놓아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생존이 목적인 내 이기적 유전자가 방어 태세로 전환할 것을 명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근래에 내가 이기적 유전자를 인상 깊게 읽어서 그런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뭘 해도 유전자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글을,
약속이나 한 듯 동시 다발적으로 사랑의 상실을 겪어내고 있는 나의 안타깝고 가여운 것들을 생각하면서 썼다. 거실에 주저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바닥에 떨구고 있다고 하고,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평일 아침 여섯시에 뭐하냐고 안부를 묻는 카톡을 보내는 등 감정의 요동을 나에게 투명하게 내보이고 있는 그들을 아주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썼다.
세상에 너무나도 흔한 보편적 감정들을 읽으며, 개별적인 슬픔을 이 보편성 속에 실어서 중화시키길 바란다. 솔직히, 그들은 펑펑 울지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할 때도 많다.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사랑스러운 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비관 속에서도 사랑스럽고, 나는 상실한 애인보다는 더 오래 그들의 곁에 있게 될 사람의 권위로 얘네들의 슬픔에 키득거린다. 어떤 슬픔은 유머 한방에 무찔러진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