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늘 크고 작은 말썽이 벌어진다.
특히 지하철 안은 거대한 압축 도시 같다. 열차 한 칸마다 다양한 인류학적 샘플이 압축돼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존재가 있다. 이름하여 '진상'.
이들은 보통 평범한 승객처럼 위장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낸다.
때가 꼬질한 발을 좌석 위에 올리고 태연하게 누워서 확성기 모드로 통화하는 승객과
아니면 작은 가방 여러 개로 좌석 3개를 차지하는 분신술을 발휘하는 승객도 있다.
애사심과 정의감에 불타던 신입사원 시절, 그들과 정면 승부를 벌이려 했다.
"저기요, 자리에서 발 좀 내려주시겠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미안함이 아니라 뻔뻔한 대답이었다.
"AC.. 뭐! 뭐! 나 좀 건드리지 마요."
그 태도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마치 바위에 계란을 던진 듯, 나의 정의감은 허무하고 초라하게 작아졌다.
그런 일들이 점점 쌓여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진상과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그들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보다 진상은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대단히 뻔뻔하다.
진상에게 맞서는 순간, 오히려 다른 승객들에게 내가 진상처럼 보이는 이상한 상황도 벌어진다.
내 인생의 새로운 전략, 바로 진상 회피 루트.
회피 루트는 꽤 과학적이다.
첫째, 빈자리가 있어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숨을 참고 옆칸으로 이동한다. 허리가 아파도, 서서 가도, 다리가 풀려도 그게 낫다.
둘째, 이어폰은 필수다.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아도 된다. 귀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방패 역할을 한다.
세상의 불필요한 대화, 의도치 않은 참견, 그리고 진상 특유의 소음에서 나를 보호한다.
셋째, 시선은 무조건 창밖이다.
아이컨택은 금물이다. 진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건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다.
눈빛 하나로 불필요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 대화는 언제나 나에게 심한 피로를 안겨준다.
넷째,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용한다.
"나는 오늘 근무 때 진상을 만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무사히 퇴근한다."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출근한다. 이건 진상과 맞부딪히지 않고 온전한 하루를 마치기 위한 생존 주문이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입술은 일자로 굳어 있고, 눈은 퀭하니 의심으로 가득 차 보였다. 20년 이상을 근무했다. 진상 회피 루트를 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승객들을 죄다'잠재적 진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음이 왔다.
진상을 회피하다고 노력해도 내 얼굴에서 진상 같은 표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피로와 날카로운 경계심이 쌓이다 보면 결국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결국 진상 회피 루트는 단순히 '도망치는 길'이 아니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균형의 길'이었다.
누군가의 불편을 피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진상 회피 루트를 졸업하는 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