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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파담 Oct 22. 2024

26. 단순함이 거룩함

35, 36일차_뿔뽀의 멜리데와 아르수아…오 페스로우소

갈리시아 지역에서는 아침에도 카페들이 많이 열려 있다. 이제는 아침 걱정 없이 순례길을 떠나도 된다.

오늘은 아르수아까지 30여km를 걷는다.

보통 20km를 걷지만 오늘은 늘어난 거리가 10km다.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은 두 세배는 더 클 것이 예상된다.

다행히 아침에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만 오지 않아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이 지역에서는 예쁜 오솔길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순례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100km이상을 걸어야만 한다.

그 시작점은 사리아라는 도시다.

순례자여권(크레덴시알)의 주의사항을 보면 사리아부터 매일 도장(세요)을 2개 이상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왜 이런 규정이 있는지는 생각해보면, 지역상권활성화를 도움을 주기 위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베드버그’ 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사리아에서부터는 베드버그가 숙소에 출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스페인 청소년들이 여기저기 풀밭에 누워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배낭은 고사하고, 옷도 벗어 던져 놓고 누워있다.

‘이제부터는 베드버그를 정말 조심해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폰세바돈의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에 도착까지 죄 묵상을 거듭해 왔다.

지금은 죄 묵상이 아닌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느님께 묻고 있는 시간이다.’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새로운 직업에 대한 부분이다.

순례길 기념품가게. 사고 싶어도 배낭 무게만 늘릴 뿐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이와 관련된 생각이 정리된 상태다.

마태오복음 6장 25절이 생명처럼 다가왔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다. 어제 서로 인사 나눴다고 하는데 내가 처음만난 사람처럼 행동해서 저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이어 7장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절실함이 왔을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모든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진 느낌이다.

멜리데에서 먹은 뿔뽀. 역시 뿔뽀예찬을 할 만 하다. 유리컵에 담긴 것은 파울리가 사 준 스페인 전통주다.

어느덧 멜리데에 들어섰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바로 뿔뽀 맛집을 찾아갔다.

반가운 얼굴이 앞서 이곳에 들어와 있다.

파울리 산드라 부부다.

이들 부부 옆에 앉아 뿔뽀를 시켰다. 가격도 12유로로 저번에 먹었던 뿔뽀보다 엄청 저렴하다.

이 집의 뿔뽀는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식감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지!’

진정 뿔뽀예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너무 맛있었다.

옆에 있던 파울리가 뿔뽀와 함께 먹는 술이라며 스페인 전통주를 한 잔 가져다 준다.

‘아 저것이다! 레디고스에서 한번 마시고 당했던 술이다!’

마시기 전부터 강하고 쓴 맛이 온 몸을 감싸온다.

파울리가 건배를 제안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입 털어넣었다.

‘역시! 엄청나다.’

파울리는 내 헐크처럼 찡그린 모습이 좋은가보다. 큰소리로 웃어댄다.

산드라도 옆에서 함께 웃고 있다.

산드라가 안 웃었다면 파울리에게 욕해줬을성 싶다.

아무튼 뿔뽀와 관련, 이 집은 추천하는 맛집이다.

멜리데의 모습. 앞에 보이는 성당이 한쪽 팔이 내려져 있는 십자고상이 있는 베드로성당이다.

이곳 멜리데에서는 봐야 할 십자가상이 있다.

십자가상이 있는 성당이름은 베드로성당(Iglesia de San Pedro de Melide)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의 오른팔이 못에서 빠진 채 밑으로 내려져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신자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 신부는 사죄경을 외워주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당부했다.

다음에 또 그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똑같은 죄를 고백했다. 신부는 사죄경을 외워줬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는 매번 습관적으로 똑같은 죄를 고백하는 이 신자의 회심 진정성을 의심했다.

급기야는 사죄경도 외워주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당신의 오른손을 내려 그 신자에게 직접 사죄경을 그어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신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권한(사죄경의 권한)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성당을 들어가지는 못했다.

순례길을 걷은 여정 동안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성당 문이 열려 있고, 순례자들이 드나드는 것까지도 확인했는데, 그 순간 다른 생각에 빠져 그냥 성당을 지나쳤다.

스페인 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 내가 길을 가는데 멈춰보라고 하더니 말과 함께 사진을 찍어 준단다.

오늘 도착지 아르수아는 스페인 북쪽길과 만나는 장소다.

산티아고 콤 포스텔라와 가까워지니 숙소에도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우리 숙소도 벌써 사람들이 들어차 만실이다.

보통 알베르게는 남녀가 함께 한방을 쓴다.

오늘 장 회장님과 나는 창가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우리 앞에는 대만에서 온 청년 순례자(팔라스 데 레이에서 같은 알베르게에 머물렀음)가 자리 잡았다.

그 옆으로는 20-30대 외국인 여성들이 자리를 잡았다.

샤워를 마치고 다니는 모습이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다. 

파울리 산드라 부부와 함께 걷기 중이다.

오늘 출발한 아침의 모습이 신비롭다. 마치 운해가 끼어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너무 멋지다.

내일이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이다.

이제 곧 800km의 여정이 끝난다는 것이 몸속 깊이 실감된다.

지금 기분이 복잡하다.

곧 순례의 여정이 끝난다는 기쁨이 아니다.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생장을 넘어 오면서 왜 내가 여기를 걷겠다고 했는지 후회가 많았다.

사발디카에서 '순례자의 행복'을 읽고 마음을 잡고 다시 걸었다.

프랑스길 첫 도시인 팜플로냐에 도착했을 때는 전날 수비리에 놓고 온 약을 다시 찾기 위해 우왕좌왕했다.

푸엔테라레이나를 지나 용서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순례길이 나를 바라보는 길임을 알았다.

산토도밍고와 오르테가에서는 기적을 만났고, 어머니의 수술까지 잘 돼 축복의 날이었다.

부르고스에 들어와서야 순례길이 순례자들의 삶과 신앙의 증거가 뿌리깊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됐다.

메세타평원(고원)과 레온평야를 지나면서는 자연의 위대함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레온과 아스토르가와 철의 십자가, 폰페라다에서 경험한 '세마나 산타'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오 세브레이로와 사모스수도원, 사리아를 지났던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이 길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있는 길인지 실감난다.

제주도 아니 청산도 돌담길을 걷는 분위기가 순례의 의미를 떠나 걷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을 주는 시간임을 느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내일이면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들어간다.

목적지까지 37km 남았다.

나는 내가 이 길을 걷는 목적을 이뤘을까?

단단해지기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내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치를 찾기 위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버리기 위해서.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

미래를 생각하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40여일을 걸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순례길을 가는 동안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많다. 이 비석 위에 사람들의 슬픔과 기원도 함께 놓여져 있다.

나는 장 회장님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했다.

“회장님? 많이 비우셨어요?”

“응! 많이 가벼워졌어! 한국 가서 나머지를 버리면 될 것 같아.”

"어때요? 여기 잘 온 것 같아요?"

"윤 국장 아니었으면 어떻게 왔겠어. 윤 국장이 있어서 이런 경험도 하게 되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오실꺼에요?"

"당연하지. 살면서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거든!"

내가 느낀 장종혁 회장님은 정말 한결같은 분이시다.

순례길의 여정도 비우기 위해 오셨고, 지금 많이 비우셨다.

순례길의 역사도 서민과 농민들의 착취와 슬픈 노동의 현실을 우선 바라보신다.

순례를 온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지 않으셨어도 나름의 은총을 차고 넘치게 받으신 것 같다.

회장님과 대화하면서 깨달음이 와 닿는다.

'단순함이 진리(거룩함)라는 것을!'

나는 '회장님 최고!'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장 회장님도 함께 따라 웃는다.

지금 우리의 웃음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을 찾는 길이 아닌, 무엇을 덜어내는 길이었음을 공감하는 웃음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회장님처럼 그저 버리면 되는 것을!

순례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의미가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다.

오랫만에 하늘과 숲을 함께 담아봤다. 이렇게 올려다보면 느낌이 또 다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천사를 만나는 길’이라고 한다.

그 길의 끝에서 천사를 만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어떤 천사를 만났을까?

나 역시 그 길의 끝에서 천사를 만났다.

함께 걷는 모든 순례자들이 천사라는 사실이다.

아니, 처음부터 천사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장 회장님을 비롯해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묵상 도중 나에게 강하게 전해오는 메시지가 있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더불어 '너의 앞을 걷고 있는 그를 보아라!' 라는 음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관찰'이라는 말로 많이 쓰인다고 생각한다.

다른 순례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들이 참 많다. 

오늘의 고민은 오 페드로우소를 넘어 몬테 도 고조까지 갈 지의 문제다. 

코덱스 칼릭스티누스 서책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도착 전 4km 지점인 몬테 도 고조에서 하루를 머물러 가야 한다고 강제성을 부여했다.

그 이유는 산티아고대성당에 10시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10시에 순례자들이 도착하면, 빵파르를 울려주었다고 한다.

이어 순례자 미사가 시작되는데, 그 안에는 향로예식(보타푸메이로)이 진행된다.

코덱스 칼릭스티누스를 따르자면 오 페드로우소와 몬테 도 고조에서 각각 하루를 더 쉬어가야 한다.

장 회장님과 상의한 결과 오 페드로우소에서 쉬고 다음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칼릭스티누스 서책에 꼭 맞게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멋진 풍경을 눈에 계속 담고 간다.

오늘 목적지인 오 페드로우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가까이 됐을 즈음이다.

순례자의 일상(빨레와 샤워)을 마치고, 숙소 안쪽 정원에 나와 햇빛을 쬐며 누워있었다.

한참동안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더니, 스페인 여성이 다가온다.

같이 담배를 피우다 이름을 물어보니 아마고이아 란다.

 “Amagoia? Could you listen to this music with me” -아마고이아? 이 노래 함께 들어볼래요?

기꺼이 듣겠다고 한다.

나는 태블릿에서 유튜브를 열어 이적이 부른 ‘말하는대로’를 함께 들었다.

아마고이아가 노래가 좋다며 관심을 보인다.

다음 노래는 '나는 문제없어'를 함께 들었다.

슈가맨에서 나온 황규영이다.

아마고이아가 열정의나라 스페인사람처럼 썬글라스를 끼고 머리를 흔들어댄다.

'스페인사람은 한국노래를 좋아한다.'

이날 내가 가져간 동시통역 이어폰(스페인어 – 한국어)를 끼고 오랜시간 그녀와 얘기를 나눴다.

아마고이아는 나보다 더 영어를 못한다.

동시통역 이어폰은 정말 제값을 하는 기기다.  

저녁에는 나의 순례길 스승이자 친구인 벨에게 연락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눔의 기쁨을 크게 느끼는 순간이다. 

꿈을 이루고 싶다면 싶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하나하나 해 내면 된다.

자유롭고 싶다면 천천히 가는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 놓으면 채워주실 것이다.

오 페드로우소에 거의 도착했다. 내일이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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