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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Sep 27. 2023

수술장 테트리스

수술 스케줄러의 역할

인턴 때 그런 농담이 있었다. 수술방 집주인은 마취과고 수술과와 간호사들은 거기에 세 들어있는 사람이라고.

병원마다 시스템이 다른데 우리 병원은 그 달에 "스케줄 전공의"로 배정된 2년차 전공의 1명이 모든 수술의 스케줄을 관리했고 동시에 응급실 콜도 받았다. 어떤 병원은 1주일마다 그 역할을 각 파트의 치프들이 번갈아가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병원은 전공의가 너무 없으면 전문간호사가 하는 병원도 있다.


스케줄 전공의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우리 병원 스케줄 전공의는 응급실 환자도 동시에 받았지만 그 부분은 제외하고 정리했다.


1. 당일 수술장 인력 배치 및 조율
2. 익일 수술 순서 및 수술방 스케줄 정리
3. 익일 수술 인력 배치
4. 응급수술 발생 시 스케줄 조율


그런데 사실 진짜 역할은 다음과 같다:


1. 방 열어달라고 마취과에게 아부하기
2. 교수님들의 욕받이
3. 수술장에 투입되기 싫어하는 인력 달래서 집어넣기
4. 인권 보호를 받지 못하는 종합콜센터


마취과랑 종종 싸우는 일도 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경우 마취과는 수술방을 닫으려는 입장이고 (정규인력 퇴근시켜야 하기 때문) 외과는 수술방을 열고 싶어 하는 입장이다 (오늘 수술들이 모두 끝내야 퇴근 가능). 지능적인 스케줄러는 마취과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최대한 많은 수술방을 받아온다.


환자가 정말 위험한 경우 수술방을 빨리 안 열어주면 외과의사 입장에서는 정말 애가 탄다. 특히나 당직 때는 사람이 적어서 그러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환자 곁에 있는 외과의사는 진짜 1분 1초가 급하다. 피가 철철 나는 환자는 마취과나 간호부준비가 안 되어있는데도 그냥 수술장으로 밀고 들어간 경우가 많다. 준비가 안 된 마취과와 간호부는 화내겠지만 환자를 살리는 것이 우선 급하기 때문에 무작정 밀고 들어가 환자 상태를 보여줘야 준비가 훨씬 빨리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환자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 모두 언제 그랬냐는듯 한 마음으로 기뻐한다.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모를 때는 일단 환자만 생각하면 된다.




스케줄러가 되면 인간들의 추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깨닫는다. 정말 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배려 따위 없다. 그리고 seniority(고참권)에 따라 우선적으로 방이 배정되는데 가끔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뭔가 꼬이면 스케줄러가 무조건 욕받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간혹 스케줄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전공의들이 있다. 병동이나 수술방에서 근무할 때는 욕을 먹어도 스케줄러 일은 정말 잘 해내는... 타고난 행정직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전공의는 기본적으로 멘탈이 좋다.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고 원칙대로만 행동한다. 그러면서 센스도 겸비해서 수술이 언제쯤 끝날지 귀신같이 알고 테트리스를 하듯이 끝나자마자 인력을 다른 방으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킨다.


임준영(가명)은 내가 본 스케줄러 중 가장 훌륭했다. 보통 스케줄러는 교수님들의 욕받이를 하면서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끙끙 앓는데 준영이는 오히려 교수님들보다 우위에 있는 입장이었다. 준영이가 갑이었다. 어느 정도 원칙을 지키되 자신에게 그동안 잘해준 교수님들에게는 방을 잘 구해주려고 노력하고 그동안 괴롭혔던 교수님 방은 쉽사리 찾아주지 않았다.


오전 외래가 끝나고 수술이 열리길 기다리던 한 교수님께서 전화오셨다.


"임준영선생? 내 수술 언제 시작할 거니?? 지금 이미 오후 4시다?"


"아. 교수님 그게 마취과에서 방들을 닫아야 한다고 해서 지금 새로 열 수 있는 빠른 방이 없다고 합니다."


두 번 세 번 간곡히 부탁하면 가끔 마취과에서 오버타임을 각오하고 마지못해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 전화한 교수님은 그동안 틈만 나면 짜증을 냈던 교수님이어서 준영이는 그렇게까지 노력하지는 않았다.


"너 이 새ㄲ.. 일을 이따구로 할 거냐?? $@%!!#^$#!!"


또 짜증내시는 소리가 좀 들린 것 같은데 임준영은 휴대폰 볼륨을 조금 줄이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또는 "어서 구해보겠습니다"과 같은 답변을 하고 끊었다. 몇 분 있다가 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다른 교수님이셨다.


"준영아~ 지금 응급수술이 들어왔는데...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니?"


"아 제가 마취과에 바로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전화기를 끊으며 준영이는 방이 없다는 마취과에게 응급수술이라며 간곡히 부탁하여 방을 얻어낼 수 있었다. 당직실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기한테 준영이는 말했다.


"이 교수님은 내게 잘해주셨으니까 ^^ 그리고 응급수술이잖아?"


동기는 속으로 웃으며 박수를 쳤다.




오히려 교수님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스케줄러가 더 최악이었다. 결국 그들이 하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려다가 마취과랑 싸우거나 기대만 높아진 교수님들에게 더 욕먹고 스케줄이 전부 꼬이게 된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원칙이라는 보호장치를 잘 활용해서 최대한 슬기롭게 하루하루 수술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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