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 - 조용한 교실, 그리고 옥상 위
해는 구름을 밀어내며 얼굴을 드러냈지만,
율현고 2학년 7반의 교실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전교 1등 이든이 칠판 앞에서 말끝을 정리하자,
학생들은 어색한 박수를 쳤다. 마치 입력된 반응처럼, 의미 없는 박자였다.
이든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눈동자 끝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떨림을 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보려 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수상 경력 목록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자기소개서 초안. ‘논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
표현은 그럴싸했지만, 정작 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조차도,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지 확신이 없었다.
-교실 맨 뒤.-
민재는 이어폰을 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고,
지후는 볼펜을 세워놓고 몇 번 쓰러뜨리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표정이 없다. 감정이 없다.
아니,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아주 오래전에 버린 아이들.
창가 자리의 아림은 창밖을 멍하니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체육 없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았다. 사실 몇 주째 그랬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 교실은 그렇게 조용히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그때였다.
차가운 기류 하나가 창문을 지나 교실을 스쳤다.
기온은 변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진입한 느낌이었다.
-옥상 난간.-
검은 코트를 입은 한 인물이 난간 위에 섰다. 미라주뉘.
그의 눈빛은 유리처럼 차갑고, 내부에서 반사된 과거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의 뒤편.-
기괴하게 비틀린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불규칙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웃는 자. 스트라이프.
스트라이프: 또 시작이군. 불만과 열패감을 긁어모아 제단을 쌓겠다는 건가?
미라주뉘: 제단이 아냐. 무시당한 감정들이 뿜어내는 불꽃이지. 꺼진 줄 알았나 본데, 아직 숨이 붙어 있더군.
스트라이프: 감정은 불완전하고 불균형하지. 결국엔 스스로를 찢는다. 그래서 나는 잘라냈다.
미라주뉘: 그 잘라낸 잔해 위에 뭐가 남았지? 네 안엔 아무것도 없잖아. 무로 덮어버린 자에게 말할 자격은 없어.
스트라이프: 무는 해방이다. 감정을 없애면 고통도 사라진다. 너는 그 고통을 정당화하지.
미라주뉘: 고통은 정당화의 도구가 아니다. 존재의 증거지. 네가 두려운 건, 그 감정들이 다시 말을 시작하는 거야.
스트라이프: 넌 그 말들을 증오로 바꾸잖아. 감정을 가진 자들 중 누가 타인을 파괴하지 않았던가?
미라주뉘: 파괴는 내 목표가 아니야. 단지... 균열을 내는 거지. 이 가짜 평온에.
스트라이프: 위선이다, 미라주뉘. 넌 감정의 이름으로 혼란을 퍼뜨리고 있어. 자비처럼 감정을 품는 것도 아니고, 나처럼 제거하는 것도 아니지. 넌—부러진 칼이다.
미라주뉘: 맞아. 난 부러졌지. 하지만 아직... 베일 수 있어.
잠시, 두 존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높고 묵직한 교실 건물 위, 그들은 마치 서로의 그림자처럼, 닮아 있으면서도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스트라이프: 감정은 너에게도 고문이었지. 그러니 네가 그것을 ‘이름 붙여주는 자’가 된 거야. 도와주는 척, 이름을 줘서 다들 그 감정에 갇히게 만들지.
미라주뉘: 그래. 이름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 그들에게 무기라도 쥐여주려 해.
스트라이프: 그 무기가 그들을 찌를 거란 건 알겠지.
미라주뉘: 그래서... 그 무기를 처음 쥐게 될 아이들을 나는 기다리는 중이야.
그 순간, 아래에서 창문이 열렸다. 이든이었다. 그는 옥상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머릿속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아주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