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오븐빵. 특별할 것 없는 흔한 빵 이름에서 독일의 특별함을 찾다.
오랜만에 비싼 빵을 사게 되었다. 브로첸류가 아닌 경우 보통은 2유로에서 4유로 사이의 가격대를 구입한다. 그런데 우연히 지나다 들어간 베이커리카페에서 5.3유로짜리 빵 한 덩이를 샀다.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기 뭐해서 고른 빵인데, 이름이 참 눈에 띄었다.
Steinofenbrot.
Stein = 돌, Ofen = 오븐, Brot = 빵
즉, 돌 오븐에서 구운 빵이라는 뜻이다.
특정 지역명 빵(예: Paderborner Brot)과 달리, 제조 방식·굽는 방법을 강조하는 일반 명칭인데.
이 날따라 유독 "Steine"이라는 단어에 쏙 꽂혔다.
독일은 여러 차례 세계사적으로 크나큰 사건의 중심이 된 나라이다. 나라 전체에서도 중심 오브 중심인 베를린. 베를린에 여행 가서 놀랐던 점은. 독일이 역사의 과오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독일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독일이 전 세계에 끼친 만행을 거짓 없이 배운다고 한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방문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비록 사진이지만 끔찍한 참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며 성찰하는 것 같았다. 이런 학습의 장이 되고 있는 현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형식적인 방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를 그렇게나 많이들 쓴다는 해설사의 전언을 듣기도 했다.
장시간 해설사와 베를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듣고 본 많은 것들에서 귀결되는 것은 단 하나. 기억하기.
기억하기 중 Stolpersteine(슈톨퍼슈타인) 또한 제일 인상 깊게 남았던 것 중 하나이다.
Stolpersteine은 Stolpern = 걸려 넘어지다 / 발이 걸리다 + Steine = 돌
직역하면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걸림돌이라...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의 걸림돌이 아니라 실제로 길바닥에 설치된 작은 황동판이 달린 돌로, 무심코 걸음을 멈추게 하여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는 상징을 담고 있다.
나치 시대에 희생된 유대인, 로마인(집시), 정치범, 동성애자, 장애인 등 박해받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식이라고 한다.
크기 약 10 ×10cm의 작은 콘크리트 블록 위에 덮여있는 황동판.
황동판에는 희생자의 이름, 출생 연도, 추방/수용소 경로, 사망지·사망일 등이 새겨져 있다. 희생자가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집' 앞 보도에 설치된다고 한다. 현재 유럽 30여 개국, 90,000개 이상의 Stolpersteine가 설치되었다고 알려진다.
막연하게 역사를, 희생자를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희생자를 기억하는 행위가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게 독일이구나 했다.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욕하던 지난 시간을 잠시나마 미안해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Stolpersteine(슈톨퍼슈타인)이 있다. 사실 너무나 평범한 골목길에서도 볼 수 있고, 복잡한 관광지 한복판에서도 볼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툭 나타나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매일 다니는 마트와 빵집을 가려면 꼭 지나치게 되는 길에서 무심히 내려다본 발아래 번쩍이는 황동판을 보면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떠올려보게 된다.
돌판이 깔린 오븐에서 구웠다는 빵인 Steinofenbrot는 진짜 돌오븐에서 구운 것도 있겠지만 보통은 대형 체인도 이 단어를 상품명으로 써서 소비자에게 전통과 장인정신을 어필하는 마케팅 목적으로 이름 붙이기도 한다.
돌로 만든 오븐에 구웠다는 빵이라면 뭔가 더 전통적일 것 같고, 더 맛있게 느껴지는 선입견(?)이 있는 것이겠지. 장작이 타는 연기가 베어든 빵 한입을 상상하며.
하지만 실제로 불맛은 나지 않는다. 돌 오븐에서 구웠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렇게 고온은 아닌 것 같지만 돌판이라 생각하면 오랜 시간 구워진 듯한 빵 껍질이 두껍고 바삭한 크러스트, 촉촉한 속살, 사워도우를 기반한 풍미를 갖는다. 겉은 단단한 편이고 속은 매우 말랑하다.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 씹으면 조금 끈적끈적하다.
Steinofenbrot.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름 붙였든 정말 돌오븐에서 구워진 빵이든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냥 묵묵히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쉬운 일은 아님을 안다. 무엇보다 독일만의 근성으로 탄생했을 Stolpersteine(슈톨퍼슈타인)으로 인해 왠지 실제로 진짜 돌오븐에서 구운 빵일 것 같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