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달나라의 장난』
학부 시절, 1950년대 문학작품의 초판본을 찾아 전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적이 있다. 국고 사업의 일환으로 초판본의 표지사진을 아카이빙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일을 핑계 삼아 종로구 서촌 일대를 떠돌며 헌책방 문지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책방 주인은 웬 어린놈이… 하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잠시간 나를 예의주시하더니 그 뒤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SNS 게재용 사진 몇 장 찍고 떠나갈 20대 남자애 정도로 여겨졌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쯤 눈도장을 찍자 책방 주인이 내게 먼저 다가와 불쑥 책 한 권을 내밀었는데, 그게 바로 김수영 시인의『달나라의 장난』초판본이었다.
김수영의 시는 지난 60여년 동안 끊임없이 재음미되어왔다. 그의 사후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수많은 비평을 비롯하여, 비교적 최근에는 그의 시어를 아트북의 형태를 통해 이미지로 변환한 작품도 생겨났다. 그러니 시인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시집, 그것도 세월에 헤진 초판을 양손에 쥐고 시어를 살피는 일은 새삼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책장을 넘겨 표제작인 「달나라의 장난」을 읽고 있을 때, 내 할아버지 뻘 되는 책방 주인이 다시 다가와 느닷없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귀한 자료를 얻은 입장에서 그의 말을 못 들은 체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책방 주인의 말을 요약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고자 4원소 외에 차가움과 뜨거움, 습함과 건조함의 네 가지의 성질을 제안했는데, 각 원소에는 그중 서로 상극이 아닌 두 가지씩의 성질이 있다고 한다. 물은 차고 습하지만, 불은 건조하고 뜨겁다. 공기는 습하고 뜨거우며, 흙은 건조하고 차다는 식의 단순한 분류이다. 이것은 4원소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성질 가운데 하나만 바꿔주면 다른 원소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가장 가벼운 원소인 불은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그 아래를 공기, 물, 흙이 차례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4원소가 원래 차지하고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 저쪽의 우주에는 불보다도 가볍고 더욱 순수한 제 5원소가 존재하고, 이 것이 가장 완전한 원소라고 생각했다. 이에 지상에는 4원소설이지만, 우주 전체로 따진다면 5원소 변환이 가능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들으며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왜 이천 년 전 철학자에게 느닷없이 연민을 느꼈느냐고 질문하고 싶다면, 한 번 이런 상상을 해보라.
어느 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제자들을 리케이온 즉, 고대 그리스의 체육관에 집합시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둥글게 모여 앉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앙으로 걸어가 모닥불 하나를 피운다. 그렇게 기원전 300년,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닥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서 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제자들은 열기에 눈이 익어가는 듯하지만, 스승의 눈치를 살피느라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그 무리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주시하고 있다. 일렁이는 불꽃 너머, 우주에 존재할 가장 순수한 원소를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 가련한 시선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물질을 통해 물질 너머의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 연금술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지상에 대한 격렬한 반항심과 불만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한편 「달 나라의 장난」 속 화자의 시선은 팽이에 달라붙어있다. 시는 아이의 장난에 대한 서술, 즉 팽이 돌리기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그 내용을 거칠게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화자는 어느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한 아이가 팽이를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게 되며 화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이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팽이를 돌리는 아이와, 돌아가는 팽이 그 자체가 말이다. 그래서 화자는 방문의 목적도 잊은 채 아이가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며 가만히 팽이를 바라본다. 곧 팽이는 빠르게 돌아가고 까맣게 변하여 서 있게 되고 화자는 그 속에서 ‘별세계’를 본다.
불 너머의 세계가 제 5원소가 존재하는 이상적 공간이라면, 팽이 너머로 보이는 ‘별세계’ 혹은 ‘달나라’는 그 성질이 이상적 공간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다. 물론 그 공간은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은” 즉 화자가 발붙이고 있는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현실과 대비되는 곳으로 이상향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렇기에 독자로서 화자가 그 “별세계”에 대한 공상에 빠져 잠시나마 현실을 잊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지만 화자는 그런 삶을 지향한다거나 그런 공간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식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한 번 더 팽이 놀이를 관찰하며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는 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팽이가 돈” 후에는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라고 말하며 현실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팽이가 돈다” 라는 구절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병치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 관찰 행위가 일면 가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의식이 “달나라”에 붙들리는 것을 막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이 단순히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이 팽이 놀이의 관찰 행위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불 너머에 있는 제 5원소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는 것인 반면에, “별세계”는 화자가 “속임 없는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는 이보다, 보이는 것을 갖지 못하는「달나라의 장난」의 화자가 더 “울어야 할” 사람에 가까운 것이다.
화자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음을” 직시하고 있고 따라서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이지만 현실과 이상공간의 대비 속에서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며 화자의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착한 마음”을 괴롭힌다.
마지막 연에 닿아서 화자는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한다. 이는 끊임없이 돌아야만 제 성질을 잊지 않는 팽이의 특성을 자신의 처지와 연관지어 말한 것이다. 즉 팽이가 보여주는 환영과 구체적 현실과의 간극을 쳇바퀴 돌 듯 오가야만이 “스스로 도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관한 “서러운”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설을 주장하며 물, 불, 흙, 공기를 제시했다.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의 잡다한 것들의 집합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흙도 수많은 분자의 조합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러니 돌이 금이 될 수 있다는 연금술의 믿음도, 불 너머의 세계에서 제 5원소를 찾으려했던 그들의 노력도 이제와서는 우스운 꼴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나이의 무게”를 느끼며 현실이 가진 유한성과 모순에 맞서고자 섣불리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지성의 모습은 “수천 년 전의 성인”의 모습이고, 그 옛날부터 팽이처럼 묵묵히 돌아가며 자신의 책무를 다한 이들 덕에 수소원자니, 산소원자니 하는 것들도 밝혀진 게 아닐까. 「달나라의 장난」에서 김수영이 느낀 “서러움” 역시 “속임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려했던 시인의 책무이자 무한히 확장될 시세계를 만들어내는 연금술이 아니었을까.
나는 시집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헌책방을 빠져나왔다.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될 책 한 권을 나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 후로 삶에 치여 글쓰기를 등한시할 때마다 나는 김수영의 시를 읽는다. 그 속에서 읽히는 왠지 모를 서러움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