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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Jan 07. 2024

가능성의 가능성

강찬혁 씨 이야기



취준생 강준현입니다.     


"현재의 제 모습으로 눈에 띄고 싶지는 않지만, 미래의 제 모습으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은 사람...입니다. ”




오늘은 집에 있기는 싫고,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아침 일찍부터 밖에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일찍 나왔는지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게 되어 버렸어. 단정한 차림새로 어딘가 정해진 곳으로 분주히 이동 중인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상대적으로 지하철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죠. 의미 모를 문구가 프린팅 되어 있는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 눌러쓴 캡모자 차림인 제가요. 그러다가 런 제 모습이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드는거에요. 그래서 저는 지하철 구석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멍하니 앉아있었어요.     

 

그동안 늘 비슷한 차림이었어요.

그러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요 몇 년 동안 그런 차림새였던거죠. 좋게 말하면 캐주얼한, 나쁘게 말하면 조금은 후줄근한 그런 차림새요.


하지만 괜찮았어요.


저한테는 가능성이 있었거든요. 눈을 감으면 제 미래가 그려졌죠. 반듯하게 브랜드 옷을 차려입고,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제 모습이요.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어울리고 차도 사서 멋지게 운전하고 다니는 그런 모습들을 저는 언제라도 실제 장면처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어요.

    

지금의 삶은 그냥 지나가는 장면일 뿐인 거죠. 그러니까 초라한 제 모습은 잠시 그늘 속에 숨겨두고 있다가, 진짜 삶을 살게 될 때 당당히 양지로 걸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어느 순간 괜찮지 않아 진 거예요. 

제 차례 전에 옆자리 분이 그런 말을 하셨잖아요.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고.

저도 그랬어요. 괜찮았던 것들이 괜찮아지지 않기 시작했죠. 순간에요.


기존의 제 세계가 깨어지는 순간일까요?

어, 뭔가 이렇게 말하니까 멋지지 않나요? 웹소설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네요. 기존의 어떤 세계가 끝장나고, 주인공은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영웅이 되는 그런 소설이요. 근데 전 아니에요. 지금 제 세계는 깨어졌고,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네요. 실망스럽게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한테 ‘넌 뭐든지 될 수 있다’라는 얘기를 들으며 살아왔어요. 저도 그 말을 믿었죠. 사실 제가 조금씩 잘하는 게 많았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모두 어중간한 재주들이었지만요. 그게 오히려 독이었던 것 같아요. 애매한 재능 말이에요. 애매한 재능의 저주?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재주 많은 사람이 오히려 빌어먹고 산다고.


그래서인지 장래희망이 자주 바뀌었어요. 어릴 때는 대통령이 꿈이었다가, 중학교 때는 축구 선수였다가, 고등학교 때는 가수가 꿈이었죠. 제가 또래들 중에서는 노래를 제법 잘 불렀거든요. 그때는 티브이에서 오디션 프로가 한창 유행일 때라 그런 데라도 나가면 단번에 스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학교 때요? 그때가 절정이었죠.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정점을 찍은 때였어요. 그냥 이것저것 즐거운 일들을 찾아다니며 모든 것들을 조금씩 맛보면서 가능성을 가늠했던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즐거웠어요. 모두들 저한테 젊으니까 좋을 때라고 했죠. 저도, 남들도, 세상도 저한테서 가능성만을 본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하고 이제 정말 뭔가가 되어야만 하는 때가 닥쳐왔어요.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그때까지도 전 무엇이 되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는데요.

  

친구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그쪽을 향해 열심히 달려갔어요. 저는 그냥 그렇게 달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떠밀리듯 나아갔던것 같네요. 그냥 남들이 다들 가보고 싶다 하는 회사들 위주로 원서를 넣어보기로 한 거예요.  애매한 마음 탓이었는지 많은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서류통과조차 잘 되지 않았어요.

    

조금은 이상했죠. 그래도 어딘가에서는 제 가능성을 알아봐 줄 것 같았거든요. 저는 제 자신을 믿었어요. 저는 패배주의 같은 건 없는 사람이거든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그런 찌질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쯤 되니까 좀 걱정이 되긴 했어요. 저도 걱정이란 걸 하긴 하니까요. 그래서 여자친구랑 사주를 보러 가게 됐죠. 여자친구가 재미로 보러 가자고 한 건데 생각보다 잘 맞더라고요.


사주를 봐주시던 분은 마침 지금이 제 운이 안 좋은 시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3년쯤 지나면 대운이 시작된다 하시는 거예요. 하긴 생각해 보면 언제나 모든 일이 다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영웅들도 항상 위기나 고난의 시기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다시 힘을 냈어요. 




때마침 여자친구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서 저도 같이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저희는 나중에 같이 붙어서 부부 공무원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시시덕거렸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좀 알아보기도 했어요. 한 삼일 동안 자료조사도 좀 하고 합격수기도 쭉 살펴보고. 보니까 저보다 학창 시절 성적도 별로고 저보다 낮은 대학 출신인 사람들도 다 붙던데요? 자신감이 확 붙어서 일단 엄마카드로 강의를 결제했어요. 백만 원이 훌쩍 넘었지만, 합격하면 다 환급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완전 이득이라고 생각했죠. 합격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1년 뒤에..시험에 떨어졌어요.

부모님도 실망하셨고, 저도 그땐 실망했죠.

여자친구는 더 실망했고요.

여자친구는 시험에 붙었거든요.

    

사실 공부할 때 집중이 잘 안 되긴 했었어요. 눈은 강의를 보고 있는데, 마음은 뜬구름처럼 어딘가로 두둥실 떠다니곤 했죠. 그래도 공부 패턴을 잡는 시간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어요.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하니까 천천히 적응하려고 했던 거예요.


여자친구가 응시한 직렬과 달리 제가 응시한 직렬 경쟁률이 높았던 탓도 있었죠. 운이 중요한 시험인데, 운이 나빴죠. 변명이 아니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운이 나쁜 시기였으니까요.


여자친구는 처음엔 실망하다가 나중엔 저를 많이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줬어요. 자기가 도와줄 테니 이제 정말 열심히 해보자고 했고요. 고마웠죠. 그런데 다음 해 시험도 떨어졌어요.


전 뭐 괜찮았어요.


요즘 공무원들 민원도 심해서 일도 어렵고 월급도 낮아서 힘들다는 기사가 많이 났었잖아요. 면직도 많이 한다고 하고요. 거 봐요. 제가 진작 알았던 거죠. 9급 공무원이 되어봤자 힘들기만 할 것 같더라고요. 아니다 싶을 때 빨리 돌아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기하는 용기도 중요한 거잖아요. 저는 선뜻 이제 이런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기로 결심했거든요. 시험 떨어진것 따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구요.


그런데, 여자친구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나 봐요. 저한테 실망했다며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황당했죠. 여자친구한테 제가 더 실망했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게 다 잘 될 텐데 그걸 참지 못하고 헤어짐을 고하다니요. 제가 힘든 시기에 그렇게 이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뭐, 아쉽지만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사람 보는 눈을 길렀다고 생각해야지 어쩌겠어요. 더 좋은 인연이 찾아오겠죠.




한 달 전부터는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해 주는 취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어요. 요즘 청년 취업을 지원해 주는 정부 사업이 제법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앞으로는 디지털 사회가 가속화되니까 그쪽 전망이 좋을 거란 판단을 딱 내렸죠. 그래서 나라에서 학원비 지원을 받아서 코딩 공부를 하고 있어요. 개발자가 되려고 하거든요. 제가 컴퓨터는 좀 잘 알죠. 느낌이 좋아요. 이제 정말 제 진로를 제대로 잡은 것 같아요.

    

새로운 결정 앞에 섰을 때는 항상 ‘그래 이거야!’라는 기분으로 머리가 번뜩했어요. 그 결정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을 때 제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죠.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을 꿈꾸며 다시 한동안 꿈을 향해 갈수 있었고요. 이번엔 근데 진짜였어요. '진짜 이거야!’ 하는 강한 느낌이 팍 왔거든요.


그런데 꼭 누나가 문제예요. 번번이 초를 치거든요.


얼마 전 엄마한테 용돈을 타가는 제 모습을 보며 누나가 저한테 또 시비를 걸더라고요. 저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너 같은 애 보고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중독된 거라고 하나보다.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라고 말하는 거예요.  카톡으로 뭘 좀 보내줄 테니 보라면서요.


그때는 무시했죠.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학원 수업시간이 좀 지루해져서 잠도 깰 꼄 누나가 보내준 카톡 내용을 보게 되었어요.  

10년째 무명 배우의 영상과, 그 밑에 달린 댓글을 캡처해서 보내놓았더라고요.    

이런 내용이었죠.   


       

처음엔 좀 멍하다가, 제가 읽은 내용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는 순간 누가 잠에서 깨라며 뺨을 내려친것 같더라고요.


가능성의 세계가 와장창 깨어지고 그다음으론 ‘뭔가 될 것 같은’ 그 상태에 중독되어서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있었던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죠.

그때부터였어요. 제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현재의 제 자신은 무시하고 미래의 제 모습만 보고 살았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능성의 가능성이 없어지고, 아무것도 아닌 제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이 들어요.


가능성이 있던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순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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