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눈이 펑펑 내렸다. 차를 타고 지하철 역까지 가며 앞 유리에 눈이 들러붙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날아와 턱. 하고 유리창에 붙는 눈들. 채 녹기도 전에 형태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 중 와이퍼가 닿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아 살아남은 눈들은 천천히 녹아내린다. 달리는 창문에 흩날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서히 녹으며 그 자리에서 아둥바둥 살아남는다.
눈은 금세 그쳤다. 명랑하게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는 이번 추위만 지나면 봄이 훌쩍 다가올 거란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 없이 깨끗한 앞 유리가 괜시리 휑하다. 차창 모서리에 맺힌 눈들은 이제 완연히 녹아 굵은 물방울이 되었다. 도르륵 톡. 가끔 흘러내린 물방울은 제멋대로 다른 물방울과 합쳐져 더 굵게 뭉친다. 그러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떨어져 내리는 것들도 있다. 다시 한 번 와이퍼가 지나간다. 남은 물방울도, 흐릿한 흔적도 말끔히 쓸어가 버린다. 언제 물이 흘러내렸냐는 듯 깔끔해진 유리가 차갑다고 멋대로 생각해 본다.
날이 말끔히 개면 이 물방울들은 다 어디로 갈까. 과학 시간에 배운 증발 같은 것 말고. 잠시 내 근처에 존재했던 그 물방울의 존재는 어디로 가는 걸까. 햇빛이 슬그머니 구름 뒤에서 모습을 비추면 금방 사라져 버릴 테지.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조금씩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지 않은가. 비가 오는 날보다 눈이 오는 날의 물방울들에 조금 더 정이 가는 기분을 느낀다. 본연의 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몇 번이고 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 때문일까? 가끔은 눈송이들의 마지막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같다. 변하고 싶지 않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그렇게 외치는 침묵 속 절규들.
날씨는 금방 개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표정도 가벼워지는 계절,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인데 차창의 물방울들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흔적을 감추었다. 차들은 물방울들의 속도 모른 채 씽씽 달리겠지. 물방울들, 아니 눈송이들이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걸까. 나라도 기억해 주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이 오던 날처럼 유리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때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자신의 발자취를 어떻게든 남기고 간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흐릿한 얼룩들. 물자국이었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옅게 낀 안개처럼 자취를 남겼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너희도 흔적을 남기는구나. 침묵 속의 절규가 아닌 침묵 속의 부던한 노력이었구나. 나 여기 있다. 나 여기에 잠시 머물다 간다. 아등바등 흔적을 남기려 남모르게 애썼구나. 눈가에 뜨끈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눈물을 흘리면 내 얼굴에도 흐릿한 눈물 자국이 남겠지. 모든 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존재해 간다. 세상에서 가장 흐릿한 흔적이 내 마음에 가장 진한 자국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