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은 좋지만 어둠은 싫다. 고요는 평온하지만 소외는 외롭다. 허허벌판에 뚝 떨어져 있어도 자연의 거대함에 조금은 긴장되고, 남들은 좋다는 밤 바다를 보면 검은 물이 나를 집어삼킬까 봐 두렵다. 이런 나에게 안식을 준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물 속이었다.
수영을 배우던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수영장 바닥으로 잠수해 내려가 몸을 뒤집고 수면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것이었다. 수영장은 보통 소리가 와글와글 울려 대는 시끌벅적한 공간이었지만, 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소리들이 들리지 않거나 간혹 아주 멀게 느껴졌다. 세상과 점점 멀어지면서도 아주 놓아버리지는 않은 느낌. 그리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영 놓아버리거나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정도의 거리. 물 속에서 나는 단절된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소원한 소속감. 그 묘한 감각에 매력을 느껴 프리다이빙을 등록했다. 물 속 깊이 내려가기 위해 숨을 참는 법을 배웠다.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숨을 참는 것도 어찌 보면 생존에서 멀어지는 행위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깊이 잠수했다. 잠수할수록 심장과 폐가 조이고 숨이 찼다. 입을 열어 공기를 뱉고 한 숨 크게 들이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 충동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질 때 몸에 힘을 풀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회복호흡을 위해 숨을 크게 헐떡이며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살기 위해 죽음에 가장 가까워지는 행위.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평온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우리 모두는 존재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렇다면 잠수는 곧 존재통일까. 존재하기 위해 느낄 수밖에 없는 호흡 충동을 느끼며 물 아래로 힘주어 내려간다. 생존에서 멀어진 상태로 서스럴 것 없는 자유로움과 평안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올라온다. 생존했음을 실감하는 순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나의 존재를 되새긴다. 내가 존재함을, 존재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외치고 되뇌이는 것.
어쩌면 나를 압도하는 깊이 속에서 내면의 잠식을 중화하고 달래는 게 아닐까. 호흡 충동으로 나의 존재통을 밀어내려는 생존 본능 아니었을까
나는 오늘도 잠수를 한다. 깊이, 더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