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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스티까 Dec 28. 2020

화장실에서 마실 물 좀 떠오겠습니다

핀란드의 깨끗한 물

핀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하며 꾸준하게 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가계부 쓰기'이다. 한정된 생활비 안에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려면 무의미하게 새어나가는 돈을 최대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긴 겨울을 대비한 디저트를 쟁여놓느라 계획에 없던 지출을 하며 가끔씩 소소한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가계부 작성을 하며 하나 알아차린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곳 핀란드에 와서 '물'을 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나에게 아이스크림 코너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수돗물에 석회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음용수로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핀란드에 도착한 첫날, 핀란드인 멘토가 식수는 수돗물을 바로 마시면 된다며 친절한 얼굴로 알려주는 게 아닌가. '아니, 핀란드도 유럽인데 수돗물을 마신다고?' 머릿속에서 이걸 그대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멘토가 핀란드 수돗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설명해주며 싱크대에서 받은 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시는 모습을 보고 '거짓말은 아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 수돗물도 그대로 마셔도 된다고 하지만 막상 수도에서 나온 물을 바로 마시면 특유의 소독 맛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사서 마시거나 각 가정에 정수기를 설치해서 물을 마신다(개인적으로는 겨울에는 수돗물을 끓여서 마시기도 하고 끓여놓은 물이 없을 때는 가끔 아리수를 벌컥 마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핀란드 생활에 대한 꿀팁을 전수해준 멘토를 배웅하고 난 뒤 주방 수도꼭지를 다시 틀어 보았다. 깨끗해 보이는 물이 시원하게 잘 나오긴 하는데... 의심하는 마음이 반쯤 있었지만 싱크대에서 떠온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멘토의 말을 순수하게 믿지 못했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미안해졌다. 싱크대에서 처음 맛본 핀란드의 수돗물은 일반 생수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물맛이었고 무엇보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이런 물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낯선 땅에서 자취를 시작하는 나에게는 매우 고마운 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핀란드에서 생수병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외국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만큼 핀란드에서는 수도꼭지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생수를 사 마실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물이 아닌 '물을 담을 병'이었다.

 

플랫 메이트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에서도 핀란드의 수돗물은 빠질 수가 없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실 물을 담기 위한 텀블러를 어디를 가든 꼭 챙겨 다녔고 학교를 갈 때도 잊어서는 안 될 물품이었다. 집에서는 주방 싱크대에서 물을 떠 마셨다면 학교에서 내가 물을 자주 떠 온 장소는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처음 화장실에서 마실 물을 떠 올 때는 조금 찝찝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물을 떠가는 모습을 보고 어느새 나도 익숙해졌다. 물 맛은 여전히 맛있었다. 화장실에서 떠왔다고 하기에는 정말 깔끔한 맛이었고 당연히 깨끗한 물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깨끗한 물이라고 무턱대고 믿어버린 이유로는 아마 평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본 핀란드의 아름다운 자연 때문인 것 같다. 숲에서 버섯과 블루베리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청정자연이 있는 곳이니 물도 깨끗할 것이라는 무한 신뢰의 마음이랄까?


이후로는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핀란드의 수돗물을 맛있게 마셨다. 그리고 단 한번 있었던 일이지만, 샤워를 하는데 목이 너무 말라서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마시기도 했으니 핀란드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은 다 마셔본 것 같다. (이런 걸 보고 현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해야 하나? 앗, 막상 핀란드 사람들은 샤워기 물은 마시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하.) 아무튼 누구나 어디서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었던 핀란드를 보며 이것도 복지의 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화장실에서 떠온 시원한 그 핀란드의 물 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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