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젊은 시절, 연애를 늘 갈망하면서도 서툴기만 했던 나는 당시 이 책을 탐독했던 기억이 난다.
제목이 주는 간결하고 선명한 느낌에 이끌려 읽었지만 당시에는 잔뜩 기대했던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는데, 이번에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은 연애에 관한 테크닉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써의 사랑에 관한 철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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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부에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로서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왜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는지 문제를 제기하며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첫째로 '사랑은 받는 것'이어서 인기와 성적(性的) 매력이 관건이라는 이유로, 둘째로는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대상'이며 이는 결혼을 전제로 한 선택의 문제라는 이유로, 마지막으로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 '최초의 감정'이 이후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상태'보다 더욱 주요 관심사라는 이유로 사랑은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를 입고 다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사랑에 관한 '이론'을 습득하고 '실천'으로 확인하며 최종적으로 사랑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 하는 사랑의 이론은 무엇인가?'에 대해 본론 부로 넘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사랑에 대한 어떤 이론이든 인간론으로부터, 곧 인간 실존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밝히며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고, 자신을 아는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으며,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라고 진단한다. (p.24)
분리가 아니라 분리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한 점이 탁월하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온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분리되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비극이고, 실제로 벌어지는 세상의 현상에서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섭하는 것이 이성(알아차림)의 축복이자 저주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실존의 특성을 지닌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공포가 아닌) 격렬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며, 불안을 일으키는 분리는 동시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분리가 수치심과 죄책감까지 일으키는 원인으로는 서로 분리되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아직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때문이라는 견해인데, (p.25) 이러한 관점은 매우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느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교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서 불안과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인간이 그 원인이 되는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가 근원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려는 일이 실존적으로 최우선이 되어 선행돼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저자는 '인간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 걸쳐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라고 선언한다. (p.26) 이제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 되는 처방이자 목표는 '합일'(合一)이라는 과제로 요약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고 저자는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개인이 유아 시절에 어머니와의 일체감을 느끼고 분리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인류도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는 시기가 있었다고 예시를 한다. 동물 가면을 쓴다든가, 토템(totem)으로 삼은 동물이나 동물신을 숭배하는 일 말이다. 이러한 맹아적 합일은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인 황홀경과 같은 도취적인 성격을 띠는데, 1) 강렬하고 난폭하고 2) 퍼스낼리티 전체(몸과 마음)에 일어나며 3)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은 흔히 마약이나 섹스, 혹은 후대에 게임이나 쇼핑에서처럼 중독성을 지니며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에 따른 불안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중독의 강도가 강하고 빈번한 사례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흔히 알거나 겪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인 어머니의 가슴과 피부에서 벗어나듯이 인간도 더욱 발전된 형태의 합일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곧 집단ㅡ 관습, 관례, 신앙ㅡ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p.29) 토템의 부족에서 집단은 점차 도시국가(polis)의 시민, 큰 나라의 시민, 교회의 구성원으로 확장되었고, 개별자로서의 개체는 자기보다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힘의 자기장 안에서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에서 벗어나 안정과 질서를 느꼈다. (불안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 산업사회에서는 평등의 개념으로까지 발전하여 근대에서는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든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일체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후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여자는 이제 다른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남자와 평등하다'라거나 '정신에는 성(性) 없다'라는 용어에서처럼 <동일성>이 평등의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근대에서의 자격에서의 '동등함'이 이제 산업 시대에는 표준화에 의한 '다름없음'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의 동일성, 표준화는 규격화를 야기하게 되면서 인간의 삶은 불안하지 않지만 공허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책에서 암시하는데 나는 매우 동의했다.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과 일상적인 휴식은 이제 위에서 만들어져 미디어를 통해 보급되고 세뇌하는 메커니즘으로 굳어지고 있다고 본다. 일터에서는 조직의 전체적 구조에 의해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지시된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있으며, 오락에 있어서도 독서 클럽에 의해 책이 선택되고 영화는 제작자나 유통업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 슬로건도 그들에게 지불을 받는다. 휴식에 있어서도 불금과 주말의 드라이브, 텔레비전이나 넷플릭스 혹은 유튜브의 콘텐츠, SNS에서의 커뮤니티, 사교 및 동호회 모임 등 모든 활동이 일정하고 기성품화 되어 있는 것이 현대의 실정이 아닌가. 감옥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그리고 슬픔과 두려움 또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나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기회를 지닌 존재라고 인식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인가? (p.34) 이러한 현대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일까를 점점 고민하면서 책을 읽어 내려가게 되었다. 이 시대에 요구되는 진정한 합일의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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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 위의 내용들이 지루하거나 난해하다고 느껴지시는 독자가 계시다면 이다음으로 나오는 내용으로 이어질 것은 힘들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중요한 논지는 간단하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분리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고자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 창조적 활동, 그래서 연애의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ART)에 관해 결론을 내리고 싶다는 내용이다. 맞다. 사랑은 일종의 아트이자 예술이어서 창조가 갖는 진정한 힘을 느끼며 그 힘이 각자의 삶의 중심이 되고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책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이제 마지막을 향한 줄거리를 따라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이 책에서 저자는 진정한 합일이란 대인간적인(對人間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도취적 합일이나 집단(도시국가, 큰 국가, 교회)이나 사상(일체성 및 동일성의 평등)과의 합일은 사이비이며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고 창조적 활동을 통한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을 이루는 '사랑'에서 그 완전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p.35)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창조적 활동인데, 인간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그 대상과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또한 사랑은 미숙한 형태의 '공서적 합일'을 뛰어넘는 성숙한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공서적 합일은 수동적 형태로써는 복종이나,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며 능동적 형태로는 지배 혹은 사디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종교적 맥락에서는 우상 숭배의 메커니즘과도 연결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문요한의 <관계를 읽는 시간>을 참조하기를 추천한다) 저자는 이러한 미숙한 사랑의 '공서적 합일'을 넘어서서 성숙한 사랑이 지니는 특징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라고 말한다. (p.38) 여기에 의하면,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의 적정 심리학 이론에서나 앞서 말한 문요한의 <관계를 읽는 시간>에서 나오는 '바운더리' 개념 등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단언한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사랑은 능동적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행위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p.40) 주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고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주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저자의 다른 저서인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는 행위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富), 나의 능력을 경험하며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체험하며 큰 환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는 선천적이거나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계발시켜야 하는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책에는 나온다. 얼핏 생각하더라도 운전이든 운동이든 읽고 쓰는 능력은 저절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결과물이라고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 말하는 '기술'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랑에는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이 있고, 우리는 그 덕목들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보호', '책임', '존경', 그리고 '지식'을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읽어가면서 내게 과연 이 네 가지 요소가 얼마나 충분히 발휘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에게는 보호와 책임이 발동되고 있지만 존경이나 지식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꼈고, 아내에 대해서는 예전에 아직 내가 힘이 더 우위에 있을 때 보호나 책임, 그리고 특히 존경에 관해서는 너무 부족한 생활을 했다는 걸 깨달았으며,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대화의 부족과 아이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무감에 따른 보호나 책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고, 동료나 친구들에 있어서도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완전하지 못한 능력을 갖추고 행위를_예술적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싶다.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에 따라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이나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유용함을 여기에 와서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자세한 내용은 독자들께서 이 책을 직접 읽어가면서 파악하시고 또한 체감하여 보시길 추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며 소감을 여기에서 마치도록 한다.
* 이 책의 중후반부에 나오는 여러 사랑의 형태(부모와 자식의 사랑,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및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실천에 관한 방대한 내용은 여기에서 논하지 않고 생략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유익하면서도 인사이트를 주는 내용이 많으니 꼭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과 <소유냐 존재냐>를 비교하여 통합해 보는 독후감을 꼭 작성하고 싶다는 다짐을 하면서 글을 마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