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선인장 사절
"하늘에계신우리."
까지 중얼거렸을까.
내 엉덩이는 전깃줄에 걸렸고,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관중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입을 틀어먹거나 소리를 질렀다.
"어머!! 쟤 3층에서 떨어진 거 봤어요?"(정확히 3층과 2층 사이)
"세상에 어떻게 베란다를 기어 올라갔대요?"
어린 쌍둥이들이 울고 있는 게 설핏 보였지만 나는 전깃줄에 엉덩이를 걸친 채였고,
추락했다는 두려움보다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에 대한 쪽팔림과 이 전깃줄에 걸린 나를 누가 바닥으로 안전히 내려줄 것인가.
그렇게 살궁리에 급급했다.
"얘 괜찮니!"
누군가의 목소리와
"119를 불러야 하지 않나요?"
그런 소리도 들렸고,
그러다 일순 정신이 바짝 드는 것이
일층과 이층 사이 늘어진 전깃줄에 걸린 엉덩이를 119대원이 와서 감싸 쥐고 지상으로 내려준다는 자체가 악몽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난데없이
"전 괜찮아요! 진짜예요!"
그런 게 화답하며 흔들흔들 그네를 타는 모양새로
걸려있었다.
3층에서 추락했단 걸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쟤는 어째서 저기서 그네를 타고 있는가, 무슨 영화촬영인가 했을 희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119보다도 앞서 인류애를 발휘하기로 맘먹은 어른들 몇이 사다리를 가져와 나를 바닥에 내려놓기까지 나는 하얘진 얼굴로 공중그네를 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총체적 난국에 어떤 포지션으로 대응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얘 근데 이 선인장 가시들은 다 뭐니!"
지상에
겨우 안착한 나는 다리가 풀려서 동그랗게 시멘트바닥에 앉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내 머리와 목덜미 몸통으로 서서히 흘러 내렸다.
그렇다.
나는 혼자 추락한 것이 아니었다. 2층 난간에 오종종 모여있던 선인장들을 가차 없이 양팔로 끌어안고 떨어졌던 것인데, 이 역시 관중의 관심을 끌었다.
장미연립 2층 집주인이 정성스레 길러왔을 선인장 가족들을 '이 낯선 아이는 대체 왜 끌어 안았을까? 그리고 왜 벽을 기어올라가 베란다로 몰래 숨어들려고 했었나?' 전깃줄에 걸린 채로 난 괜찮아요! 를 외치는 이 아이를 구해놓고 보니 여간 찜찜하고 음험한 구석이 있지 아니한가.
논개처럼 추락해, 희대의 행운아가 됐지만 관중들의 큼큼한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나를 보증해 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그들 사이 쌍둥이가 울고 있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괜찮다며,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고작 내 나이도 열세 살이었던 것이고, 쌍둥이들이 방금 공중그네의 주인공이 사촌언니였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기에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의 가오를 남겨두었다.
사정을 들은 누군가에 의해
부랴부랴 이모에게 연락이 가고,
이모는 가슴에 무슨무슨 상사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아이들은 엄마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는데
"엄마 언니가 벽 타고 올라갔어"(얘들아 벽이 아니라 배관이란다),라고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밤새 이모는 손톱깎이로 내 몸에 박힌 가시들을 빼내주었다.
"아이고 가여워라"
신실한 이모는 나를 살려준 게 하나님이라고 몇 번을 말했다.
"이수야, 넌 주님의 귀한 양이란다"
그래서 나는 이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고백했다.
"이모, 나 떨어지면서 사실 주기도문을 외웠는데....."
순식간이라 한 구절밖엔.
그것도 속사포로.
여름방학 때 놀러 온 아홉 살 쌍둥이들을 남양주 집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게 그날의 임무였고,
이른 시각 신림동에서 굽이굽이 버스를 갈아타고 남양주 장미연립 앞까지 왔을 때, 난 해냈다는 들뜬 기분이었다.
영재소리를 듣던 쌍둥이들에 비해 모든 게 늦됐던 나는 그 먼 길을 실수 없이 안전하게 아이들을 공수해 왔다는 사실이 훈장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이모는 의류 공장에 다녔고 아홉 시에 돌아온다는 걸 잊고 내게 임무를 부여한 어른들의 탓이었다. 무엇보다 대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데가 없었다.
가열찬 폭염 한가운데에서
이모와 연락이 닿는다 해도, 한참 버스를 타고 와 문을 열어줄 상황이 아니란 데 생각이 미쳤고,
우선 있는 돈을 털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이고 계단에 앉아있다가 밖으로 나가 눈대중으로 바닥에서 3층까지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니까 가늠만 하고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천장이 낮은 오래된 연립이라 2층반 높이였고 나는 만만하네, 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 해볼 만하다는 긍정회로는 그동안 구겨진 자존심을 세울 기회였다.
"언니가 올라가서 열어줄게"
하는 공언과 동시에 외벽 배관을 탔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연이었다.
시나브로,
'쟤는 무모해',란 말을 오랜동안
좁쌀처럼 주워먹으며 쑥쑥자랐다.
그러나 그날,
주님의 귀한 양이란다,는 이모의 말과
사는내내 비루하고 힘든 시간마다 슬그머니 올라왔던 앞뒤 재지않던 그 무모함이
가끔은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는 걸,
나는 잊지 않았고,
그런 내가 (조금) 좋았다.
(방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