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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긍 Nov 01. 2020

에필로그. 607호와 이별하기.

이삿날 새벽의 일기

이사 전 날.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서운한 느낌이 가득.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새 집에 대한 생각은 여러 방면으로 가득이었다. 근 세 달 동안 이사. 셀프 인테리어, 낯선 단어들 속에서의 번민과 고통, 조금 설렘.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이제 이 공간. 이런 아침은 내겐 없겠구나 하면서.갑자기 울컥해진다. 눈도 다 뜨지 못한 상황에서 펜을 들고 막 그려보았다.     

나만 아는 집. 내게만 보이는 집을.


누워서 그려서 엉망. 삐뚤빼뚤.              

집을 살 때까지 장을 사지 않겠다며 행거로 버텨온 날들. TV때문에 당최 방을 나가지 않아서 TV를 밖으로 놓은 후에야 탈출할 수 있었던. 내 방

좋은 침대를 사서 꿀잠 자겠다며 가구도 아닌 침대를 사러 다니던 기억이 난다. 언니가 물려줬던 25년 된 서랍장도 여기서야 바꿀 수 있었지. 전화기를 들고 수다 떨고. 울기도 하고. 누워서 나를 원망하며 하이킥을 하던. 최대한 버티고 싶은 만큼 편했던 여기. 내 방     

         

침실



 작은 일자형 싱크대. 흰 키큰장. 흰 냉장고. 흰 식탁. 밥을 거의 해먹지 않고, 고기와 커피를 주로 먹었던. 주황색 전기포트는 이사 두 주 전에 할 일을 다 한 듯 고장이 났다. 수고했다. 우리 집 가전 중에 가장 바빴던 너.

 저탄고지. 간헐적 단식. 채식 등 수 많은 다이어트의 시도가 이뤄졌고. 친구들에게 브런치를 대접한다고 분주했고. 가끔 오시는 부모님을 위해 사온 반찬들로 채워졌던 작은 내 주방.

 식탁 위, 파란 창 찍은 액자 속 그날은 따뜻했고. 식탁 옆 여섯 장의 풍경은 내가 사랑했던 날들이 담겨 있었다.(가끔 보게 되지만 언제나 좋았다) 영양제를 한 주먹씩 쥐어 주면 꾸역꾸역 먹으며 건강을 기원하던. 나. 운동을 해야 했다.

부엌



 오층까지 껑충 큰 플라타너스가 창을 가득 채운 풍경이 참 좋았던 거실. 처음엔 테이블을 놓았다가 티비를 놓고 좋은 소파를 찾아댔던 시간들이 있었다. 크고 편했던 암체어. 3인용 소파를 거쳐서 거실 크기에 딱 맞는. 연두빛 나무 질감이 살아있는 소파는 불편한데 참 좋다. 거기 앉아서 ‘도깨비’도 보고. ‘나의 아저씨’도 보고. ‘멜로가 체질’도 보면서 울고. 웃고.

 책장을 세 개 이상 넘기지 않겠다 결심한 후로. ‘책을 빌려 읽자’ 했는데. 꼭 읽어야 하는 책만 읽던. 나의 알뜰한 독서 시대. 하지만 결국 작년 말에 안 읽은 책이 33권이 쌓여서 '긍긍의 안 읽은 책. 덜 읽은 책' 프로젝트를 탄생시킨 이 곳.

책도 읽고. 숙제도 하고. 밥도 먹고.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술도 한 잔 하던. 부모님 오시면 이불을 반으로 접어서 자기도 했던 멀티플렉스 복합 문화 공간. 이젠 더는 내 것이 아니구나.         

거실

 


오래된 집에 어울리는 작은 욕실. 허벅지에 닿는 세면대에 처음엔 놀랐지만 곧 적응. 문틀을 부수고 자리 잡은 세탁기. 백만 년이 된 듯한 상부장도 이젠 볼 수 없겠구나. 물살을 세게 나오게 하는 샤워 헤드는 선물로 남길까 했는데. 새로 오는 입주자는 욕실을 고쳐달라 해서 수리를 한다는 소식. 하! 이 빌어 먹을 적응력…….   

            

화장실


 그리고 베란다. 집의 밖도 안도 아닌 곳. 집에 두고 싶진 않지만 없애지도 못하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더니 이사 직전엔 절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여기는 나무를 스친 바람이 들어왔었고. 막 세탁한 빨래가 마르고. 바질. 애플민트. 제라늄. 올리브. 유칼립투스. 휘카스. 라일락. 팔손이, 커피나무들이 자라기도 했던 생명의 공간이었다.              

베란다


저녁 먹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찍은 우리 집. 저렇게 많은 세대가 한 동에 사는 데 내가 아는 분은 경비아저씨 한 분 뿐이었다. 아침마다 겹겹이 주차된 차 속에서 내 차를 뺄 때면 흔쾌히 도와주시던.



새로 이사 가는 집은 주차시설이 더 안 좋다. 흠. 서울서 살기가 녹록치 않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간 속의 602동 607호. 다섯 시간 후엔 이사가 시작되고. 아홉 시간 후엔 우리 집이 남의 집이 된다. 그래서 그런가. 잠이 안 온다. 마음이 싱숭생숭.

이왕 쓴 거 집 고치는 이야기를 써볼까? 쓸 수 있을까? 갸우뚱 하면서 블로그에 카테고리를 만들어본다. 그래도 잠이 안 온다. asmr이라도 틀고 자야겠다. 오 분이면 잠드는 열 시간짜리 유튜브를..몇 분 들으면 잠이 들까...     

안녕. 6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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