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로 Mar 02. 2023

[퇴사일기 2] 이제 회사 나오지 마세요

회사 잘 다니던 서비스 기획자의 퇴사일기 2편

나의 표면적인 퇴사 사유는 권고사직이다. 사직원에는 퇴직 사유를 ‘서비스 종료로 인한 권고사직’으로 기재했다.


내 소속이었던 기획팀을 비롯해, 서비스를 담당했던 우리 조직의 전체 인원이 권고사직 제안을 받았다. 제안을 받은 인원은 70명 정도였다. 팀원이든, 팀장이든, 팀장을 관리하는 리더이든 모두 같은 옵션이었다. 서비스 종료 통보 이후로 인사팀으로부터 제시받은 조건은 권고사직으로 퇴사하고 실업급여를 받거나, T.O를 들고 두 달 안에 사내의 다른 팀으로 이동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두 달 후면 조직이 해체되고, 내가 갖고 있는 T.O도 사라지며, 남은 인원은 인사팀의 소속으로 이동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물론 인사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출근하지만 하루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최소한의 복지와 급여만 받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지만 사내에서 서비스 기획자로서 이동할 수 있는 팀은 생각보다 많았다. 현재 운영 중인 서비스를 만드는 팀은 총 두 팀이 있었다. 사내에서 개발된 모바일 게임을 PC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연동하는 서비스, 사내 포털 서비스를 만드는 팀이 있었다. 둘 다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팀이었다. 회사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동료들의 대부분은 연동 서비스 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그 팀으로 이동하기 싫었다. 나는 온 학창 시절을 게임하며 보냈고, 대학생 때도 게임 프로그래밍을 했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고, 퇴근 후나 주말마다 늘 게임을 하는 지독한 게임광이지만 이 회사의 게임은 게임으로서 존중하지 않았다. 그 게임에는 내가 게임으로서 기대하는 즐거움인 모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과정, 건강한 자극, 나만의 노하우 개발, 다른 플레이어와의 소통 같은 것들이 없다. 그런 게임을 하는 사용자들을 위한 서비스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었다. 아직 출시하지 않은 서비스더라도 개발 단계에 불이 붙어서 이것저것 실험해 보고 싶은 기능이 많은 서비스가 있다. 그런 서비스들은 미래가 기대되고, 잘 성장하도록 애정을 쏟고 싶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두 서비스의 고도화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 보였다. 새로운 방식을 익히기 귀찮아하는 서비스 사용자도, 업무 루틴과 강도를 바꾸기 싫은 서비스 개발팀도, 연간 계획에 없는 업무는 일단 거절하는 협업부서도, 우리들의 급여를 주는 높으신 분들도. 그런 서비스를 만들다 보면 나도 숨만 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서비스 출시를 준비 중인 팀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게임 회사에서 서비스를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그동안 뼈저리게 겪어 왔기에 같은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보기엔 비전이 없어 보였다.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는 일상이 지옥 같았다. 할 업무가 없었다. 나는 당장의 중요도 높은 업무가 없다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슈를 들여다보거나, 과거의 내가 쓴 기획서를 다듬거나, 레퍼런스 리서치를 하거나, 개선할 점을 찾는다거나, 고도화 기획서를 쓴다거나, 새로운 기획을 제안할 자료를 만들었었다. 서비스 종료 소문이 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서비스 사형선고 이후로는 모두가 의욕을 잃었다.


나는 동료들과 같이 개발해 볼 만한 사이드 프로젝트의 원페이지 기획안을 수십 장 써 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동료들의 얼굴을 보면 같이 시작해 보자는 말을 도저히 꺼내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지쳐 있었다. 우리는 매달 법정 근로시간을 충족하려면 업무가 없어도 일단 출근해야 했다. 인사팀 소속으로 이동하는 날을 미리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힘들었다. 인사팀에서는 매주 면담을 요청하며 최대한 빨리 결정하라고 밀어붙였다. 우리는 어떤 선택이든 빠른 시일 내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선택을 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사내이동을 하겠다거나 퇴사를 하겠다는 선택을 안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사팀 소속으로 매일 따뜻한 사무실에 나와서 식대를 챙기고 근속일을 늘이며 이직 준비를 해도 되고 부업을 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출근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아까웠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을 통해 얻게 된 여유가 있다. 내게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바로 선택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삶의 태도이다. 내 선택 이후로 많은 것들이 바뀐다면 더 나은 조건을 기다리거나 제안하고,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며 충분히 고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전 01화 [퇴사일기 1] 회사 짤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