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잘 다니던 서비스 기획자의 퇴사일기 4편
나는 일하는 속도 때문에 회사를 다니기 힘들어했다. 재직중일 때 심리상담을 하면서 깨닫게 된 내용이다.
내가 회사에서 기획했던 서비스의 주 사용자는 10대였다. 유행에 민감한 도메인을 다루고 있기도 했다. 도메인 트렌드는 평균적으로 2주마다 바뀌었다. 멜론 탑 10이 교체되는 속도라고 보면 된다. 흐름의 변화가 꽤 빠른 편이다.
그래서 시장 상황에 맞게 자주 최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 사용자가 함께 사용하는 다른 서비스를 참고해서 우리 서비스를 더 경쟁력 있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영역부터의 개선을 시작하고 싶었다. A/B 테스트도 해보고, 실험실도 운영하며 빠른 시도와 결과 관찰을 해보고 싶었다.
피그마의 미출시 폴더에 묵혀둔 기획서가 오조억장이다. 나는 틈만 나면 피그마로 기획서를 썼다. 레퍼런스 리서치를 하며 베껴올 만한 서비스를 분석하고, 기획한 기능이 출시됐을 때 예상되는 매출과 사용성의 변화를 분석했다. 화면 와이어프레임도 설계하고 기능 명세도 쓴다. 관리할 데이터 테이블도 설계한다. 데이터를 집계하고 싶은 클릭 지표도 설정한다. 썼던 내용을 여러 번 보면서 수정하고, 버전 관리를 한다. 한국의 수많은 서비스 기획자들이 비슷하게 하고 있는 업무다.
더 이상 작성할 신규 개발 기획서나 기존 기능 고도화 기획서가 없으면 정책 쪽을 손봤다. 나는 리디나 당근마켓, 여신티켓에서 잘하고 있는 UX 가이드를 만들어서 우리 서비스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관련 도서들을 다섯 권 정도 구매해서 참고하고, 우리 서비스의 모든 화면을 한 페이지에 펼쳐놓고 UX 현황을 분석했었다. 어떤 상황에는 어떤 컴포넌트를 사용하며, 언어별로 어떤 어조와 어미를 사용할 것인지 가이드라인을 잡는 게 재밌었다.
그런데 기획했던 수많은 제안들을 모두 개발하거나 출시할 수는 없었다. 기획 팀장님은 모든 기획이 다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내가 기획서를 얼마나 오랫동안 썼든 그게 엎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늘 있다는 걸 알아 둬야 한다고 했다.
팀장님의 말씀은 이해됐다. 비용은 한정되어 있고, 사용할 곳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용을 사용할 우선순위를 합리적으로 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정해진 우선순위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 기획 총괄님은 불만이 있으면 더 목소리를 키워서 말하라고 했다. 정말 표현 그대로, 큰 목소리로 이야기해야 했다. 그런데 정해진 우선순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본인의 판단을 의심하는 거냐고 소리 지르며 모두의 입을 닫았다. 나는 더 많은 기능을 좀 더 자주 출시해서 실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협업부서와도 일하는 속도가 맞지 않았다. 우리 팀에서 개발하기로 협의된 내용을 들고 협업 요청을 하면, 협업부서에서는 연간 계획에 없으니 검토해 보겠다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지연되는 이슈는 손에 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우리 쪽에서 하면 일주일이면 될 일을 네 달에 걸쳐해 주고는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하겠다며 으름장을 피웠다. 우리도 다른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 때문에 많은 비용을 잃었다. 회사의 절차상 꼭 협업해야 하는 부서였다. 나는 그렇게 회사원이라는 집단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점점 잃어 갔다.
상담사님은 위의 상황에 대해 날짜를 찍어놓고 고민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찍어놓은 날짜가 될 때까지는 리더가 모는 배를 타며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익히는 거다. 리더의 배에 타고 있는 동안에는 내 속도와 힘만으로는 배를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울 수 있다.
상담사님은 목표일이 되면 그 이후에도 리더가 모는 배를 탈지, 나만의 배를 타고 항해를 할지 결정해 보기를 제안하셨다. 그리고 나는 결정의 날보다 6개월 일찍 서비스 종료 소식을 들었다.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내 속도를 찾아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