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덕후’이고 나의 큰누이는 ‘차덕후’다. 그 덕에 나도 보이차를 띄엄띄엄 마셔왔다. 겨울이 되니 다시 보이차 생각이 났다. 누이에게 염치도 없이 2인용 자사호 하나 굴러다니면 기부해달라고 했더니, 고급스러운 자사호에 30년 묵은 보이차까지 바리바리 싸서 보내왔다. '막입'에게도 제법 풍미가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보이차와 식물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른바 '묵은둥이'가 가치 있다는 것. 식물은 오래될수록 기품이 있고, 보이차는 오래 묵을수록 풍미가 깊다.
보이차를 우리는 다구를 ‘자사호紫沙壺’라고 한다. 누이가 보내온 이 자사호는 ‘서시호西施壺’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자사호의 모양이 중국 고대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서시西施의 가슴을 닮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누이는 손편지에 “이 자사호를 아이 다루듯 잘 닦고 길들이라”고 당부했다. 아, 주전자도 아이 다루듯 해야 하는구나. 식물덕후만 집사인줄 알았는데, 차덕후도 집사 노릇을 해야 하는구나.
그러고보니 덕후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집사’ 노릇을 할 때야 비로소 덕후로 인증 받는다는 사실. 카메라 덕후는 ‘카메라봇짐’을 산소통처럼 여겨야 하고, 자동차 덕후는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물생활 덕후는 ‘꿈에서도 환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덕질’이란 나의 즐거움을 위한 일이지만 그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괴로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