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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연어 Oct 24. 2022

안 가본 길

(50대, 인생을 바꾸는 100일 글쓰기)


일요일, 늦은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밀려와 대충 걸터앉아 졸았다. 이러다 다 살로 가지 싶어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출발 전 어디로 갈까 생각해 봤는데 이왕이면 안 가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신목동역 주변에 작은 지식산업센터(오피스)를 하나 분양받은 게 있다. 얼마나 지어졌는지 궁금도 해서 겸사겸사 그 언저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목동은 평지라 산이 없는데 유독 신목동역 주변으로 작은 동산이 있고 그 위에 빌라들이 운집해 있는 곳이 있다. 올림픽대로 빠지기 직전에 그 동네가 늘 궁금했다. 한강과 안양천이 내려다보이고 밤에는 여의도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오피스 공사현장 주변에 차를 세워놓고 동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성냥갑 아파트로 채워진 목동의 분위기와 판이하게 서로 다른 모양의 빌라들과 아담한 가게들이 한갓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는 일정 구간 평지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급경사 구간이 시작되었다. 가파르게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그 길을 따라 뷰 맛집 빌라들이 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최고 높이에 이를수록 전경이 예술로 변해간다. 선선한 바람과 하나 둘 켜지는 불빛들이 집에서 졸던 나에게 이온음료같은 시원함을 불어넣는다.


동네를 둘러보고 내친김에 염창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기를 이어갔다. 이곳 역시 차로는 가끔 지나가 봤지만 걸어서는 처음이다. 걷다 보니 OO전자, ZZ음반, FF모터스 등 작지만 예쁜 건물을 사옥으로 쓰는 회사들이 보인다. 그런 업체들을 보자니 갑자기 나는 그동안 무얼 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이렇게 사업으로 한 획을 긋는데 이십 년 일을 해왔지만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 작은 곳에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나 자신이 순간 부끄러워졌다. 물론 이 일로 그동안 무탈하게 먹고살았으니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성장보다는 유지에 치우친 지난날에 여러 감상이 밀려왔다. 



오 년 반 정도 열심히 일하고 멋지게 은퇴하려는 생각이 최선인가? 되짚게 된다. 그러나 욕심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지금껏 걸어온 길도 능력만큼 살아온 셈이니 반대의 길(실패)로 가지 않은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게 합리적인 생각일 테다. 


가끔씩 안 가본 길을 걷다 보면 전두엽의 특별한 모드(mode)가 활성화되는 기분이 든다. 마치 해외여행을 할 때의 그 이국적인 풍경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평소의 반복되는 일상에선 보이지 않던 루트가 생기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한다. 그래서 삶의 정체기가 오면 일부러 찾아 떠나보는 것도 좋다. 


저녁은 좀 다양하게 먹고 싶다는 큰아이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걷기를 마치고 이마트로 갔다. 서로 간에 음식궁합은 모르겠지만 연어초밥과 송편, 에그타르트, 딤섬을 사서 집에 왔다. 간단한 조리 후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겨우 걸어서 늦은 점심을 소화시켰는데 또다시 한가득 배를 채웠다. 먹고 걸어야 하는데, 걷고 먹었으니 오늘의 만보 걷기는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도 길 위에서, 길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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