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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v Jun 26. 2023

아빠, 그림책

우당탕탕 그림책 공부하는 아빠     

그림책은 참 매력적이었다. 미취학 연년생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나를 도서관으로, 도서관 내에 따로 마련된 유아도서 코너로 늘 이끌었다. 글과 그림이 사이의 여백을 가진 그림책이 좋았고, 그 여백에서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때로 어떤 장면에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될 때도 있었다. 남자이고, 운동을 좋아하고, 특공대 장교 출신의 아빠이지만 어떤 그림책을 읽고 나서는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코만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나를 이루는 그 이름들(아빠, 남자, 장교, 행정일 등)과는 상관없이 그림책은 내 마음 한 구석을 만져주었다. 마치 내 내면에 아직 아직 등불이 켜지지 않은 채로 '그림책'이라는 이름의 방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골랐던 그림책들은 이제 내 내면을 읽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그림책을 접하다 보니 그림책심리지도사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림책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면서 각기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에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무의식도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책의 몇 마디 말과 그림이 무의식과 만나게 되면 수많은 Story들이 만들어진다. 이 story들 중에는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고 꺼내야하는 것들이 있다. 상담(談)의 담을 나타내는 한자어는 말씀을 나타내는 언(言)과 불꽃 염(炎)자가 합쳐진 단어라고 한다. 즉, 상담이라는 것은 마음 속에서 타고 있는 불꽃을 말로 풀어내고, 나눈다는 의미이다. 나는 '자기 마음을 설명해내는 그 말'이 학습이 필요한 또 다른 언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이어서, 한국말을 모국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내 마음 상태를 한국말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따라 울적한 내 마음을 '우울', '멜랑꼴리', '저기압' 등의 단어들로는 말할 수 있지만, 이 울적한 마음이 어떤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인물과 연관이 되어 있는 건지 또는 어릴적에 만났었던 어떤 인물과 연관이 되어있는지 살펴보고 말로 설명해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한편 내 마음 속에 무언가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명확하게 모를 때가 있다. 마음 속에 있는 그 뜨거운 불이 내 마음에도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화상을 입힐 만큼 위험해서 그걸 밖으로 꺼내야 살 수가 있는데 명확하게 어떤 감정인지를 모르는 채 살아갈 때가 있다.

그림책의 말과 그림 그리고 그림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내 마음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화(火)를 입 밖으로 표현해내는 언어가 되어주기도 하고, 마음 한켠 어딘가에서 자취를 감춘 채 타고 있는 화(火)를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림책 심리지도사 학습과정을 우당탕탕 걸어보는 아주 기다란 산책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10 주 동안의 산책. 걷는 중간에 길 안내를 도와주는 여러 심리학자들을 만나게 될테고, 걷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해줄 소중한 그림책들도 만나게 될 거다. 산책을 떠나는 나에게 그림책심리지도사 1급이라는 경유지는 있지만 아직 최종목적지는 어딘지 모르겠다. 산책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떠오른 그림책이 있다. 이재경 작가의 [작은 눈덩이의 꿈]이라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구르고 굴러서 커다란 눈덩이가 되고 싶은 작은 눈덩이의 여정을 담고 있다. 작은 눈덩이게는 부럽기만 한 크기를 가진 커다란 눈덩이와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자기를 보며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는 작은 눈덩이를 보면서 큰 눈덩이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자기도 큰 눈덩이가 되고 싶다는 말에 큰 눈덩이는 이렇게 답을 해준다. 


"구르면 된단다."


여백이 가득한 큰 눈덩이의 대답을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왜 큰 눈덩이는 작은 눈덩이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큰 눈덩이가 아직 작은 아이를 위해서 설명을 아껴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르는 게 때로 힘이 들 수 있고 때로 어디로 굴러가야 할지 몰라 헤맬 수도 있으며, 자기가 가는 길을 의심하는 다른 눈덩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보다 작은 눈덩이가 오롯이 자기만의 길을 굴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짧은 대답에 가득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눈덩이는 스스로 굴러가며 깨달아야 하는 게 있고, 그렇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작은 눈덩이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커다란 눈덩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계속 굴러가는 그 시간들은 분명 작은 눈덩이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큰 눈덩이의 배려 깊은 안내를 보면서 상담을 받는 누군가가 결국 자기 삶의 주체자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담가의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그림책상담지도사를 공부했고, 심화과정을 시작하지만, 여전히 그림책과 심리학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방대한 심리학 이론들은 아직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가득하다. 심리학자들이 해주는 이야기들과'지금, 여기, 오늘'을 사는 나하고 어떻게 연결지어야 하는지도 아직 서툴기만 하다. 다만, 나의 '구르기'는 현재진행형이고 구르는 과정이 끝나갈 때 즈음엔 내 내면그릇이 이전보다 더 커지고 이전보다 더 단단해질 것이다.

아! 난 여전히 그림책이 정말 좋다.




* 그림책심리지도사 1급과정은 [그림책성장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지도사양성 자격증 과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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