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공부하는 아빠 #2
"당신이 무의식을 의식할 때까지 그것은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고,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 것이다. - 칼 구스타프 융"
융도 무의식을 이야기한다. 다만, 프로이트와는 달리 융은 무의식이 가진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본능적이고 공격적이며, 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아가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억압되어 있으니 정신병리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와 달리, 융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무의식들은 전체정신실현을 위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이것은 결국 '진정한 자기'로 이끌어주는 토대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프로이트보다는 융의 무의식이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무의식이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탐색의 과정, 받아들임의 과정을 통해 수용가능한 모양의 무의식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보다 희망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자기실현'을 위한 시간대가 인간에게는 꼭 온다고 한다. 보통 인생의 전반기에는 맡겨진 일들을 해내며 열심히 달려가다가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기를 찾는 여행이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그림책 보는 걸 좋아한다. 그림책에서 표현하는 상징들을 해석하고, 해석된 내용과 내 마음을 연결 지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가끔 아이들의 일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지금과 같이 내 안에 쌓인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는 시간도 가지고 있다. 융의 이론들을 듣자니 가끔씩 가져보는 조용한 이 시간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잠깐의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언젠가 우린,
"나는 나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나'가 진짜 나일까?"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융과 함께 하면서 지금 알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내면의 여행 가운데 발견되는 '자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멈추어 생각해 보게 된다.
자아가 의식하는 외적인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자아의 일부이긴 하나 무의식적인 부분으로 '그림자'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인 가면을 쓴다. 우리는 숱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는 아이, 자라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윤리적인 규범을 잘 지키는 학생이 되고, 직장, 동호회, 종교집단 속에서 숱한 페르소나를 썼다가 벗는 행위를 반복해 가며 살아간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환경 가운데 발현되는 외적인 인격이긴 하나 자기 자신은 될 수가 없으니,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이 페르소나를 벗고 쉴 수 있는 공간은 꼭 필요하다.
"우리 아들은 어디서나 잘 웃는 게 이뻐."
어디에서도 잘 웃는 아이가 이뻐서 부모가 아이에게 칭찬을 담아서 하는 말이다. 칭찬을 들은 아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잘 웃는 아이'로 살아간다. 실제 웃음이 많은 이 아이는 어디서나 미소 짓는 자신이 싫지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불쾌한 상황에서도 웃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는 그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려는 성숙한 노력을 보일 때도 있지만, 때로 웃고 싶지 않을 때에도 자기가 쓴 그 페르소나(잘 웃는 아이)를 벗지 못해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미소가 많은 것도 자기이고 때로 미소 짓고 싶지 않은 순간에 만나게 되는 여러 감정들도 '자기'가 만나는 소중한 감정들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무표정을 짓게 되거나, 찌푸리게 되고, 성을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의 그 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문제이기 때문이다. 페르소나가 굳어지게 되면 '잘 웃는 아이'로 살 때에만 사람들 특별히 주양육자인 부모에게서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는 일종의 거짓말에 속게 된다. 이는 형식적인 삶을 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이도, 어른도 사회적인 가면(페르소나)을 벗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또 누군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수용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자아의 무의식 적인 부분인 그림자는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것들(욕설, 거친 말, 행동, 울분 등)로 나타난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인색함이나 편협한 태도, 비겁한 모습들이기도 하다. 평소 자기와는 다른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면 누구나 당황하게 된다. 특별히 멋진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당황할 것도 같다. 사람은 자신의 어두움을 의식화해야 밝아진다고 한다. 내 안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도 내 모습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림자에 대한 내용을 들으니 미국의 한 소년원을 다룬 글이 떠오른다. 소년원에 수감된 거친 소년들을 한 선생님이 놀랍게 변화시켜 가는 내용의 글이었다. 소년들의 그림자를 다룬 선생님의 방법이 참 놀라웠다. 아이들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종이와 펜을 나누어주었고, 소년들의 느낌이나 기분을 그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해 보도록 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자기 안에 있던 여러 그림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생각해 보니, 그 아이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기들의 그림자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애덤 래르하우프트가 글을 쓰고 스콧 매군이 그린 [저리 가! 잡아먹기 전에]라는 책이 있다.
표지에 보이는 동굴 속에는 용이 한 마리 살고 있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용은 동굴을 서성거리는 동물들을 향해서 "저리 가! 잡아먹기 전에!"라고 위협을 주며 내쫓아버린다. 사나운 호랑이도 동굴 앞 용의 으르렁 앞에서는 도망가기 일쑤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조용히 지내던 용 앞에 뜬금없이 겁 없는 아이가 등장한다.
아무리 겁을 주고 화를 내도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도망가지 않고 동굴 앞에서 꼼짝 않는 이 아이 덕분에(?) 용은 드디어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된다. 동굴 밖으로 나온 무시무시한 용을 본 아이는 '피식' 웃는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하고 예상치 못한 반응이어서였을까, 용도 아이의 피식 소리에 따라 웃게 되며 둘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게 된다.
우리 마음속 동굴에는 몸을 숨긴 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림자(용)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동물들이 동굴 앞을 지나가면서 용의 목소리나 존재를 얼핏 얼핏 인지했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마음속 거대한 그림자를 얼핏 마주할 때가 있지만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이란 두렵기만 하다. 용을 만나고, 용과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아이의 '피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진지하지만은 않게, 또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그림자의 존재를 그냥 인정해 줄 정도의 마음이라면 어떨까.
또 한편, 아이가 용을 보고서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두려움을 앞서는 순수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너무도 순수한 아이의 내면이 용을 무장해제시켜 버린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담겨있는 내면의 순수함을 한 번씩 꺼내보고, 순수한 내면이 자라날 수 있도록 가만히 도와주는 일은 언젠가 만나게 될 그림자와 조우하도록 돕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림책이, 글쓰기가, 조용히 나와 대화해 보는 시간이 돕는 일 중 하나가 될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