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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 다시 살아내는 법

by 모래쌤

상실.

작년 말 무안 공항에서 여객기가 추락했을 때 온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그 보다 2년 전에는 헬로윈 축제에 간다고 나간 가족들이 다시 못 돌아온 일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일도 있었다. 떠난 사람들은 급작스레 떠나서 안타깝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 큰 상실을 어떻게 견디고 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도 닥혔다. 준비도, 예고고 없이.




느닷없이 찾아온 남편의 부재는 내가 서 있는 땅이 갈라지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해결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모든 걸 남편이 알아서 해 와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자동차도, 전셋집 계약도, 보험도 모두 다 남편 명의로 했고 그걸 다 바꾸느라 고생했다. 주민센터에서 뗄 수 있는 서류란 서류는 다 뗀 것 같다. 둘째 아이가 미성년이다보니 친가 쪽에서 법정대리인도 세워야 명의변경이 되는 것도 있었다. 각종 서류에 남편 이름 옆에는 네모 박스를 쳐서 '사망' 이라고 찍혀 나왔고, 그걸 큰 아들과 둘이 수없이 보며 여기저기 다녔다.





남편을 보내고 한 달도 안되어 나는 멈췄던 교습소를 다시 열었다. 평생 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던 나는 멈추는 순간 삶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수업이 끝나면 차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을 닦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침이면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일을 나갔다. 책이 내 숨구멍이었다. 독서모임도 다시 나갔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이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어떻게 책이 저 상황에 눈에 들어오냐" 하는 눈빛이었다. 나로서는 살기 위해 붙잡은 것이 책이었던 것인데 그 이유를 설명하거나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마취가 풀려 진통을 느끼는 환자처럼 나는 점점 더 많이 아프고 우울했다. 재정의 압박도 나를 두렵게 했다. 의논할 곳 하나 없는 현실이 더욱 서러웠다. 이 모든 게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자신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외로워지기로 했다. 이것도 언젠간 끝이 있겠지. 그렇게 믿으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외로움 속에서 다시 숨 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 속에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을 건고 있다. 그 시간들이 나를 호흡하게 하여 나는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진짜 쎄. 엄마가 제일 강한 것 같아. 진짜 강해요 엄마는. '


큰 아들이 말했다. 아들이 말하는 '세다'의 의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내 모습을 보고 한 말일 것이다. 그 말은 내게 위로였지만, 동시에 버텨야 한다는 또 다른 짐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가 마음의 병을 얻어 또 한번 나를 흔들고 있지만 나는 흔들릴지언정 뽑히진 않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살아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다시 이 깊은 나락에서 둥둥 떠올라 전에 내가 살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말했다.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코 앞의 일도 알수 없으며,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그것은 타인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서로 보듬어가며 살아가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한치 앞도 알수 없는 삶을 사는 내가 사는 법 역시 '사랑' 이다. 아이들, 엄마와 아버지, 멀리서나마 나를 걱정하는 동생, 슬쩍 안부를 물어주는 20년지기 친구, 책을 통해 만나는 학생들, 블로그와 브런치의 이웃들과 나누는 '사랑'이 내 눈물을 닦아준다.


오늘도 나는 그 사랑으로 살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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