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그림책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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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색깔나라에 네 가지 색이 살고 있었어요.
불처럼 열정적인 빨강.
햇살처럼 화려한 노랑.
바다처럼 멋진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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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또 한 가지 색은 뭐였죠?
안 보이네요.
아! 하얀색이네요.
빨강, 노랑, 파랑 근처에
보일 듯 안 보일 듯,
있는 듯 없는 듯,
하양이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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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나라에 하양은 왜 있는 거야?"
"잘 보이지도 않고, 보여도 밋밋하고."
"재미없어!"
빨강, 노랑, 파랑은 하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하양은
아름답지 않고 쓸모없는 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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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빨강이 침을 튀며 말했어요.
"밋밋한 하양 위로 색을 칠하자!
그러면 더 멋진 세상이 될 거야!"
빨강은 하양 위로 빨간색을 힘차게 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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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하얗게 비워두기엔 그 자리가 너무 아까워."
"하양이 전부 빨강이 될지도 몰라. 우리도 색칠하자!"
노랑도 파랑도 하양 위로 열심히 색을 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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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 하양도 색이야."
하양은 싫다고 했지만, 빨강과 노랑과 파랑은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이제 색깔나라에 하얀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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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빨강, 노랑, 파랑의 경계에서 새로운 색이 생겨났어요.
보라.
주황.
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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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처음 보는 색이야."
"우리가 서로 겹치니까, 멋진 색이 나왔어!"
"색깔나라가 훨씬 화려해졌어!"
빨강, 노랑, 파랑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색깔나라가 점점 더 아름답게 발전한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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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칠해보자. 또 얼마나 아름다운 색이 나올까?"
"좋아! 색깔나라를 멋진 색으로 꽉 채워보자!"
"하양 위에 색 칠하기를 정말 잘했어!"
빨강, 노랑, 파랑은 신이 나서 말했어요.
그리고 다시 여기저기 색 칠하기를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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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순간.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이 나타났어요.
색은 많아졌지만, 아름답지 않았어요.
무섭고 흉한, 아니 무슨 색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병든 빛깔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색과 색 사이에 아무런 여백도 없어서
점점 답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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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진하게 색을 칠해 보자."
"그럴수록 더 이상한 색만 나와."
"이제는 빨강도, 노랑도, 파랑도, 잘 보이지 않아. 색깔나라가 병든 것 같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빨강이 열정을 가지고 계속 칠했지만, 그럴수록 빨간색도 점점 줄어들었어요.
노랑도 파랑도 색을 칠하다 말고, 지쳐서 쓰러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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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잘 못 된 거지?"
"점점 좋아질 줄 알았는데..."
"하양이 했던 말이 기억나."
그제야 빨강, 노랑, 파랑은 하양이 생각났어요.
하양의 색과 여백이 있는 색깔나라가 그리웠어요.
하지만 늦었어요.
그들은 너무 멀리 가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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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이 없는 색깔나라는
이제 자기 색깔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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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빈 여백도
소중한 시간인데
자꾸 무엇으로 채우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