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그림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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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창고 한켠, 조그만 누런 밀알이 살고 있었어요.
밀알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깜깜한 곳에 갇혀 있었지요.
“아, 햇살이 가득한 밖으로 나가고 싶어!
저 파란 하늘 아래에서 커다란 밀로 자라고 싶어!”
그게 밀알의 간절한 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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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어느 날, 창고 문이 활짝 열렸어요.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이 솔솔 불고, 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밀알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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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농부 아저씨가
밀알을 다른 밀알들과 함께 차가운 흙바닥에 휙— 던졌어요.
“어? 뭐야?
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싫어!”
밀알은 깜짝 놀라 굴러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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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바람이 불어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곳으로 굴러갔어요.
“됐어! 이제 여기서 햇살을 먹고
커다란 밀로 자랄 거야!”
밀알은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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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햇살은 너무 뜨거웠고 밀알의 몸은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어요.
그때였어요.
근처 썩은 나뭇잎 아래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도토리 하나를 보았지요.
“으... 나도 저렇게 죽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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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도토리가 힘없이 말했어요.
“날 불쌍하게 보지 마.
나는 더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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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나무가 되려고... 죽는다고?”
밀알은 도토리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햇살 때문에
몸은 점점 갈라지고 뜨거워지면서
머리도 어지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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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어요!
농부 아저씨가 메말라 가는 밀알을 발견했어요.
그는 꼼꼼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밀알을 들어
부드러운 흙 속에 살며시 심었어요.
이번에는 밀알도 도망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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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둠이 찾아왔어요.
밀알은 흙 속에서 서서히 녹아갔어요.
“아, 이게... 죽는 거구나.”
그러곤 밀알은 깊은 잠에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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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후,
눈부신 아침 햇살이 잠든 밀알을 깨웠어요.
“어...? 여긴 어디지?”
눈을 뜬 밀알은
자신이 어둠 속이 아닌,
밝은 들판 위에 있다는 걸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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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초록 들판, 반짝이는 햇살 속에서
밀알은 커다란 밀 이삭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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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밀알은 깨달았어요.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나를 포기하는 순간이 필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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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그것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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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존경하는 박양식 목사님이 건네준 이야기 씨앗을 다듬어서 만든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하늘나라에서 안녕하신지요? 거기서 또 어떤 이야기 씨앗을 창작하고 계실까요? 당신이 이 땅에서 뿌린 씨앗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꽃이 되고 열매가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