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혼자만의 시간 갖기
예약된 시기를 지나서 병원에 갔다. 다행히 약이 딱 맞게 떨어져서 하루만 아침약을 건너뛰고 별탈 없이 진료를 받았다. 그 동안 공황이 와서 필요시 약을 먹었고, 공황은 사라졌지만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안 좋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흡연 때문에 몸이 안 좋은가 싶기도 하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흡연은 당연히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새해도 되었으니 금연을 시도해보라고 했다. 그냥 웃었다. 좀 줄이기는 하겠지만 금연은 아직 자신이 없다. 선생님이 당분간 필요시 약을 아침약으로 추가하고, 필요하다면 하루 3번까지 복용이 가능하니 먹으라고 했다.
수면은 한 동안 12시 전에 자서 8시 즈음 일어나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 밤을 새면서 수면리듬이 깨졌더니 약을 먹어도 잠이 쉬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수면제 데파스 0.25mg을 먹어보겠냐고 물어보셨는데, 싫다고 했다. 수면 시간이 너무 길고, 잠을 깨는데 오래 걸려서 부담스럽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했다. 어렵게 수면제를 줄였으니 다시 돌아가기 싫을 거라며, 그럼 기존대로 큐로켈정 12.5mg만 먹자고 했다. 병원에 다녀온 날은 예전에 받았던 수면제가 남아있어서 데파스 0.25mg도 먹었는데, 역시 12시간을 잤다.
부스피론 염산염정 5mg은 항불안제다. 유당이 들어있어서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되어있다. 불안은 여러가지 증상을 보인다. 가슴이 조여들거나, 숨 쉬기가 힘들어지기도 하고, 손에 막 땀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심장이 엄청 큰 우퍼처럼 쿵쾅거리기도 한다. 무엇에 불안이 오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최근에 면접을 포기하고 점차 안정을 찾았지만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곧이어서 머리도 답답해졌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심할 때는 한 알씩 먹기도 했는데, 이번 진료에서는 당분간 정기적으로 복용을 하자고 했다.
최근의 불안 요소는 남편과의 관계다. 남편은 평소처럼 장난을 걸며 나를 놀리는데, 나는 가끔 남편이 변했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랑이 변했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니라고 펄쩍 뛰거나 어이없어 하는데, 그걸 보면 내가 남편의 어투 하나하나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돌아보게 된다. 남편이 변한게 아니라 내가 변한 건 아닐까? 내가 관계하는 그룹에서 어떻게든 불편한 점을 찾아내는 속성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남편 뿐이니 그런걸까? 그러면 난 어떡하지? 나는 한번 관계가 틀어지면 돌아기지 못하는 사람인데. 회사는 그만두고 사람들을 끊어낼 수 있지만 남편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떡하지? 나는 남편 없이는 못 사는데 어떡하지? 혹시 우리에게도 권태기라는 것이 온 건가? 내가 회사를 안 가기로 하면서 남편에게 부담을 줬다고 생각해서 남편의 서운하거나 힘든 마음이나, 나를 무시하는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있는 건가?
남편은 상담 갈 때마다 나를 데려다 주고, 기다렸다가 데리고 온다. 내가 상담 오가는 길이 너무 외로워서 가기 싫다고 했더니 자청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1년 반 동안 그렇게 하고 있다. 병원은 상담센터 뒷 건물인데, 병원은 혼자 다닌다. 어쨌든 병원은 간단한 상담과 처방만 받으면 되니까. 병원은 같이 간적이 한 두번이고, 의사 선생님을 함께 본 적은 없다. 이번 병원 가는 날 아침, 같이 가자고 했더니 예약이 안 되어서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고, 의사 선생님 보려면 씻고 준비해서 가야 하니 다음에 같이 가겠다기에 내가 삐졌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크게 한숨 쉬면서 그럼 기다리라고 했고, 나는 그냥 혼자 갔다. "나는 삐지지도 못하나? 서운한 걸 어떻게 하나? 5년 동안 내가 어떤 의사 선생님한테 진료 받는지 궁금하지도 않나?"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갔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는 준비 시간이 걸리면 병원에 늦으니까 그런거라고 미안하다며 진료 잘 보고 오라고 카톡이 왔다. 진료를 마치고 아랫층에서 혼자 쌀국수를 먹으며 '다음에 같이 오자'고 답장을 했다. 혼자서 창밖을 보면서 밥을 먹는 데 그 시간이 의외로 좋았다. 뭐든 남편과 같이 하고 싶어하는, 특히 병원이나 상담은 혼자 가기 싫어하는 내가 무색해질 정도로 편안하고 좋았다. 가끔 밖에서 혼자 밥도 먹고 차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생각은 많았다.
나는 키 큰 남자들을 안 좋아한다. 물론, 공유나 변우석 같이 크고 멋진 사람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180 넘어가는 남자들과 같이 있으면 답답하다. 그림자 지고, 눈 높이도 안 맞고, 위압감이 느껴져서 별로다. 마찬가지로 같이 있는 사람이 조금만 소리 높여 얘기해도 나는 금방 위축되고 급 불안해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사람들이 싸우거나 약간의 갈등상황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그 순간을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치고 받는 액션이 낫지, 갈등이 고조되는 대화나 상황, 고성이 오가는 상황은 나에게는 엄청 압박으로 느껴진다.
그러니 남편이 조금만 불편해하거나, 조금만 소리를 높이거나, 조금만 어투가 달라져도 나는 엄청 위축되고 스트레스 받는다. 특히 남편은 내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니까 더 작은 자극에도 내가 크게 반응하게 된다. 설날에도 남편은 별스럽지 않게 "왕복 4시간에 낮잠 2시간이니까 6시간이나 잤네" 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그게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려서 "나 삐졌다. 떨어져 앉겠다"며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바람에 남편이 티는 안 냈지만, 친정 식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내가 사과하고, 남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 들었다면 본인도 반성하겠다고 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병원 일로 서로 마음 불편한 일이 생긴거다.
일련의 과정을 돌아보면, 내가 남편에게 뭔가 계속 기대하고 확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전날 잠을 못잤으니, 좀 더 푹 자고 쉬라는 돌봄의 말을 듣고 싶거나, 내가 여전히 병원에 다니는 것에 대한 위로를 동행해주는 것으로 안심시켜 주었으면 하는 기대들. 하지만 나 조차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그 당시에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니까, 이미 충분히 돌봄을 하고 있는 남편임에도 내 정확한 요구를 알아듣기는 힘들었을 거다. 나조차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남편이 어떻게 귀신처럼 알고,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 해주겠나. 그런데 나는 남편에게 그걸 원했던 거다. 내가 계속 남편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나는 남편에게 의지한다. 언니도 걱정할 정도다. 남편이 엄청 부담스러울 거라면서. 남편을 믿고 사랑하는 걸 넘어서 나는 때때로 남편에게 엄청 의존한다. 혼자서 모든 걸 했었다. 아주 옛날부터 혼자 고깃집도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가고, 영화관이나 공연장도 가고, 쇼핑도 가고, 여행도 갔다. 혼자서 많은 것들을 아주 오랫동안 했고, 혼자가 재미없고 지칠 때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과 같이 하는 시간이 좋았고, 남편과 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남편이 해주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남편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남편의 말에 엄청 귀기울였다. 힘들 때 많이 의지했고, 남편이 좋다고 해야 내 마음을 결정하고 행동했다. 남편의 허락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남편의 지지가 있어야 뭐든 할 용기가 생겼다.
남편의 보호와 사랑을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그런 것처럼 끝없이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금 부모님은 내가 돌봐야할 사람이고, 내가 어떻게 해도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지만, 남편은 부모님이 아니니까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은 거다.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이 관계에 금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불안이 있는 듯 싶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결혼해서도 잘 산다고 믿었다.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나는 혼자서 뭘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을 두고 혼자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상태가 점점 악화일로를 걷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긴 시간동안 나는 혼자서 뭘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주 단순히 혼자서 외식을 하거나, 차를 한잔 하는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주말에 사회인 야구를 하다가 2년 전 쯤인가,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나서 하는 말이 나랑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내가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면서 혼자 두는 것이 편치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즐겁고 씩씩하게 남편의 취미를 응원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느끼기에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이제 정신 차리고, 남편에게 기대고 있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겠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남편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무게추를 나에게로 옮겨와야겠다. 남편에게 계속 나를 돌봐달라고 떼 쓰지 않고, 씩씩하게,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서도 잘 살아야겠다. 그럼 일하는 시간도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을 거다.
약을 다시 하나 추가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 많이 좋아졌다. 불안을 잘 다스리면 언제든지 줄일 수 있는 약이다. 외롭고 힘이 들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밤에 혼자 산책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늘 남편과 사랑이와 다니던 산책 말고,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을 아주 잠깐이라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