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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n 03. 2019

서른셋, 너는 자라 내가 되었지

다른 누구처럼이 아닌 고유한 나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김애란 〈서른〉


스물일곱,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어떤 문장은 가슴에 파고든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서른〉을 읽었을 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이 문장 다음을 넘어가지 못하고 한참 머물러 있었다.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반년 넘게 재취업 준비를 했다. 그러다 그마저도 그만두고 막내작가 일을 시작했다.


월급은 반 토막, 가장 나이 많은 막내작가였고 근무환경도 열악했다. 열정 하나로 기쁘게 일할 수 있다고 마음먹기에 나는 애매하게 나이 들어버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것들이 아른거렸다. 돈과 나이, 경력과 사회적 위치 같은 것들이 자꾸 떠올라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내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선택한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전공과 회사와 스펙을 쌓아오느라 이제껏 돈과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찍 작가 일을 시작할걸. 그런데 이 일은 정말 나한테 맞는 걸까. 이 일을 오래 계속할 수 있을까. 그런 복잡한 생각들로 잠 못 드는 밤이 많았다. 그때 이 문장을 만났던 거였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나를 괴롭히던 직장 상사와 서로의 험담을 흘기던 직장 동료들, 사회물에 찌들어 푸념을 늘어놓던 친구들, 늘상 밤새느라 하얗게 뜬 방송작가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나는 훗날 당신들이 되고 마는 걸까. 겨우 그런 얼굴이.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스물일곱 나에게는 막막한 문장이었다.



서른둘, 너는 자라 네가 되겠지


시간이 흘러 서른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이 문장을 만났다. 어느 작가의 SNS에서였다. 무언가에 푹 빠져 집중한 딸아이의 사진을 올린 작가는 아래 이런 문장을 적어놓았다. ‘너는 자라 네가 되겠지.’


김애란 소설 속 문장에서 단지 모음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내’가 ‘네’가 되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나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엄마의 마음이었다. ‘우리 사는 세계는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롭단다. 그 안에서 너는 자유롭게 살아. 온전히 너 자신으로 자라렴’ 하고 격려하는 엄마의 마음.


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며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계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어둡고 차갑고 아프고 나빠지기도 한다는 걸.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는 걸. 그런 세계의 맞은편에 엄마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를 믿고 껴안아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려울까,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어려울까.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두 가지 일은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만 같다.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자신을 희생해야 하니까.


‘너는 자라 네가 되겠지.’ 이 한마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엄마의 강인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뭉클했다. ‘너는 자라 네가 되겠지.’ 서른둘 나에게는 따뜻한 문장이었다.


일러스트 (c) 수명


서른셋, 너는 자라 내가 되었지


얼마 전 페이스북에 편지처럼 도착한 6년 전 포스팅을 읽었다. 스물일곱이었던 내가 쓴 일기였다.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면 마음이 아프고 자주 울었을 것이다. 지금껏 흘려보낸 시간과 노력과 돈과 고민과 서러웠고 불안했던 밤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프지는 않다. 누군가에겐 나의 선택이 무모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나는 꽤 즐겁다고 생각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중요한 건, 태어나 처음으로 ‘하고 싶다’는 의지로 내 인생을 결정했다는 것. 지나간 시간과 선택들이 볼품없다 해도 쓸모없진 않다. 그것들이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으니까.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야. 


서른셋의 나는 답장을 썼다.


6년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막내작가 일을 시작했던 너의 일기.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작가로 살게 해준 첫 발걸음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주위의 반대와 불안정한 미래에 내심 맘고생이 심했지만, 꿋꿋이 그 길을 선택해준 너에게, 과거의 나에게. 잘했다고 토닥이고 싶어. 너는 자라 내가 되었지. 결국 내가 되었지. 그래서 고마워.


그때의 문장은 조금씩 변해서 이렇게 완성되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었지. 결국 내가 되었지.’ 서른셋 나에게 고마운 문장으로.


잘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하지만 나는 매일 자라고 있다. 하루, 한 달, 한 해가 지나면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라 있을 것이다. 그때도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처럼이 아닌 고유한 나로 살아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자라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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