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3일 밤‧ 서울&대전
박규는 2층집 마당에 서서 붉게 물들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74세.
자신의 인생도 저 황혼처럼 저물고 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젯밤, 오랜 친구 리차드 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1972년, 월남전 포연 속에서 만난 사내.
그리고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인연.
리차드는 3개월 만에 소식을 전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단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긴장이 묻어 있었다.
“장춘동이 다음 주 모습을 드러낸대. 극우단체 행사야.”
장‧춘‧동 !!!
규가 사랑한 이들을 죽이고, 그의 인생을 짓밟은 악마.
규는 주먹을 꽉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핏빛 노을 속에 장춘동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규는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가 울린 지 세 번 만에 전화를 받는다.
“력이냐~”
서울에서 기자로 일하는 아들이다.
“오늘 올 수 있냐?”
“네. 조금 있다 출발할게요.”
뚝.
뚜우 뚜우 뚜우~
* * *
서울 종로구 K일보 편집국.
박력은 아빠와 통화를 마친 뒤 주필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력의 해병대 선배인 성기훈 주필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무슨 일인가?”
“내일 월차를 쓰고 싶습니다.”
주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는 박 기자가? 왜~ 무슨 일 있나? 혹시 소개팅?”
“아니요. 아버지를 모시고 광주에 다녀오려구요. 오래 전 죽은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이구… 그래, 잘 다녀오게.”
허허 웃으며 등을 두드리던 주필은 력이 나가자, 웃음을 거둔 채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검은 케이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구형 군용 단말기를 닮은 소형 위성폰이 들어 있었다.
보통 휴대폰보다 무겁고 투박한 외관.
그가 전원을 켜고, 버튼을 꾹 누르자—
삐—— 짧은 통화연결음.
곧이어, 틱―
수신 성공을 알리는 날카로운 전자음이 작게 울렸다.
주필은 낮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내일 광주에 간답니다.”
수화기 너머로 금속성의 노이즈에 섞여, 거칠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다음 주 오랜만의 외출인데 예감이 안 좋아. 그동안 너무 오래 갖고 놀았어. 이번에 정리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주필은 정중하게 전화를 끊고, 곧바로 다른 번호를 찾아 스크롤했다.
휴대폰 화면에 ‘퍼플’이란 글자가 떴다.
* * *
력은 서둘러 신문사를 빠져 나왔다.
주차장에 있는 차들 중 가장 낡은 차, 2년 전 입사할 때 중고로 산 싼타페에 올라탔다. 두 시간을 내달려 밤 9시 무렵 집에 도착했다.
거실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쭈글쭈글한 노인과, 키는 작지만 몸집이 탄탄한 중년 남성이 낡은 소반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부러진 상다리는 청테이프로 감겨 있었고, 그 위엔 계란부침과 깍두기, 그리고 탁주 몇 병이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마을 어귀부터 들려왔을 고물차 소리도, 거실을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도 이 시니컬한 술꾼들은 못 듣고 못 본 척한다. 밖을 내다보는 일 없이, 그저 묵묵히 탁줏잔만 기울일 뿐이다.
“으이구! 저 술꾼들을 누가 말려!”
력이 일부러 현관문을 거칠게 열면서 소리쳤다.
“베트남 술 한 병 사 왔어요.”
“오예! 우리 술~”
중년의 남성 탄이 탄성을 질렀다.
술꾼들의 시선이 력의 가방에 꽃혔다.
“어이쿠! 어련하시겄어?”
력이 삐진 척 웃으며 술병을 꺼냈다.
지난달 베트남 출장 때 푸꾸옥 공항에서 사 온 ‘퐁당 럼’이다.
력이 주방에서 손을 씻고 맥주컵 세 개를 가져와 탄 형 옆에 앉아 퐁당 퐁당 졸졸졸~ 술을 따르고는 외쳤다.
“못, 하이, 바, 요!”
두 주당이 기분 좋게 따라한다.
“못, 하이, 바, 요!”
‘못 하이 바 요’는 베트남어로 ‘하나, 둘, 셋, 건배!’라는 뜻이다.
규는 이미 얼굴이 불콰하다.
“시간이 몇 신데… 아빠는 이것까지만 드세요.”
“알았다, 알았어. 오자마자 잔소리는.”
“또 그 얘기 하셨죠?”
력이 웃으며 물었다.
탄은 젓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럼주를 원샷했다.
“무지개가 신의 약속? 약속은 개뿔~ 신은 쥐뿔~”
술만 마시면 터지는 둘의 합창.
수백 번 들은 이야기.
력도 이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지경이다.
규의 이야기는 매일 밤 악몽처럼 반복되는 잔혹한 동화였다.
동화엔 늘 무지개가 뜨고, 같은 빌런이 등장했다.
빌어먹을 무지개, 썅노무 장춘동.
막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쳐죽일 장춘동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