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빈정대는 말투. 귀찮다는 표정. 요것 봐라. 어떻게 얘기를 해도 들어가지 않을 상태. 나는 15살짜리 학생 하나를 앞에 두고 있었다.
중2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사춘기가 벼슬이냐.
올라오는 화를 꾸욱 눌렀다. 더 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내보냈다. 그때 무슨 일로 불렀는지는 어렴풋하지만 어떤 감정이 올라왔는지는 지금도 또렷하다. 그래. 나를 봐도 역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감정적인 동물에 가깝다. (그리고 감정적이어야 인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감정 뒤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중2병이 병으로 안 보이기 시작했고 사춘기가 벼슬로 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그 기간을 성장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상황이 보여도 당장 화가 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다 받아준다는 뜻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단호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뒤로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는 눈도 필요하다.)
나는 그 과정을 두 번째 걸음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기 때는 몸을 일으켰다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첫걸음마가 그렇듯 위태로울 수도 있고 어설플 수도 있다. 자신의 마음은 계속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마음이 앞선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힘을 주고 일어나야 하니 조급함, 불안함, 분노와 같은 감정에 힘이 실린다. 어떤 때는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를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 떠올려 보면 나도 10대를 보내는 어느 구간에서인가 괜한 분노나 반항심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추측하건대 몸이 자라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릴 때는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흑과 백이 아니라 회색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괜히 말에도 가시가 돋쳐 있었고 내 기준에 매여 있었다. 언제나 내 생각이 옳았고 누구나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나도 그랬다. 나도.
학생들을 보니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대개의 경우) 희한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웃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모두 다 지나는 터널. 그 구간이 언제쯤 시작해서 어디쯤에서 끝나는지 이제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구간을 지나는 학생들이 거기 갇히지 않게끔 살펴봐 주는 것. 그리고 그 구간을 지나서 나왔을 때 내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는 것. 그래야 일으킨 마음으로 뛰기 시작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