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는 실을 뽑아 고치 집을 짓는다. 느릿느릿 뽕잎만 먹던 누에들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실을 한올 한올 토해낼수록 미세하게 누에의 몸이 조금씩 줄어든다. 자신의 몸을 축내가며 하얀 고치를 완성하는 누에. 모두가 잠든 사이 누에들은 밤새 실을 뽑고 단단한 고치(코쿤)을 만든다. 그리고 고치 속으로 사라진다.
하얗고 단단한 고치만 남아 마치 그 안에서 누에가 깊은 잠을 자는 것 같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고 마치 죽은 듯이 아무런 미동도 없다.
나도 누에처럼 고치에 들어가 잠을 잔 적이 있다. 플라잉 요가에서 ‘코쿤’ 동작은 해먹을 온몸에 감싸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이다. 한 마디로 휴식시간. 플라잉 요가의 다른 이름, 반중력 anti-gravity 이라는 이름처럼 중력에 저항하여 온몸의 근육을 써서 매달리고 버티는 자세 끝에 등장하는 코쿤은 늘 달콤해서 졸음이 밀려왔다.
그 안에서 누에는 가만히 쉬지 않고 변태 과정을 거친다. 스스로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때가 되자 조용히 나방으로 변신하는 누에. 누에의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난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처럼.
올해 타계 100주년을 맞은 프란츠 카프카는 마흔 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돌진, 미완성 장편 『성』은 그가 신경쇠약에 걸려 요양할 때 쓴 작품이다. 그리고 카프카는 『성』을 쓴 후 2년 뒤에 눈을 감는다.
카프카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다. 고치에서 나방이 나와도 고치는 여전히 그대로 단단히 남아 있는 것처럼. 그의 미완성 장편 소설 세 편은 고독 3부작이라 불린다. 고치를 뚫고 나방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고치라는 이름의 고독의 시간을 거쳐야 하니, 고치의 변신 역시 고독에서 태어난다.
시간이 지나도 카프카의 작품은 새 생명을 입은 듯 여전히 새롭게 읽히고 현재성을 지닌다. 비결이 무엇일까. 누에가 완전히 자신을 소멸시켜 실을 뽑아내고 나방으로 변태했듯이, 카프카는 자신을 완전히 소진 시키며 그가 쓰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면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시민적 삶에 저항하면서.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글로 쓴 것만이 남는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시간을 보존하는 방법은 글쓰기다. 글로 쓴 것들은 시간의 바깥으로 나가서 부패하지 않는다. 조금 더 전투적으로 말하면 시간의 흐름에 맞서 저항하는 방법이 글쓰기다.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에게 미완성 소설의 원고와 편지 일기를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친구는 카프카의 부탁을 배반하여 그의 미완성 장편을 모두 출간했다. 카프카의 장편이 없었다면 절반의 카프카였을 테니, 친구가 세운 공이 있다. 하지만 카프카의 편지와 일기는 지나치게 사적이라서 카프카의 내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은 불편함을 안긴다. 무엇보다 카프카의 수치심을 불러 일으킬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친구에게는 공과가 모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소설은 대부분 자전적이라서 그의 편지와 일기를 아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카프카는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일기와 편지에 쏟아냈다. 특히 편지는 수신인에게 쓰더라도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카프카는 마치 모든 순간의 생각과 느낌을 기록하겠다는 자세로 쓴다.
1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소설은 우뚝 서 있다.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작품은 그 시대와 장소를 보여주고 동시에 그 시대와 장소 자체가 된다. 프라하에 가면 카프카가 있고 카프카 하면 프라하가 떠오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그의 영원한 안식처는 문학이었다. 문학이 카프카에게 아늑한 고독, 고치(코쿤)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