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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Aug 29. 2021

몸, 쓰다

운동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운동한다, 고 말하면 무슨 운동해요? 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요가 시작했어요. 혹은 필라테스 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면 몇 가지 반응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런 물음. 요가, 필라테스도 운동이에요? 그럼 나는 속으로 그럼요 얼마나 땀 나는 운동인데요, 하고 외치지만 겉으로는 그냥 웃고 만다. 축구나 농구처럼 몸을 격렬하게 쓰면서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만을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나 필라테스가 그저 정적인 동작의 반복으로 보일 것이기에. 건강을 위해 몸을 단련하거나 움직이는 일을 ‘운동’이라고 하지만 사람마다 몸을 단련하고 싶은 정도나 목적, 허용되는 움직임의 범위가 달라서 운동의 정의도 다르다.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기 전까지는 내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학창 시절에 했던 피구는 나에게 공포의 시간이었고 (스릴과 공포는 한 끗 차이다. 스릴이 많은 경우 짜릿한 재미가 있을지 모르나 빠른 패스 속에서 날렵하게 피하기와 누군가를 공으로 맞춰서 내보내기 둘 다 나에게는 진땀 나는 일이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비롯한 각종 체력단련은 기록화 동시에 점수화되어서 재미나 즐거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예체능에 속하는 미술, 음악, 체육 중에 그나마 체육 시간을 가장 덜 힘들게 느낀 이유는 아마 보기 좋은 결과물에 대한 압박이 가장 적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체육 시간에는 가장 많은 ‘자유 시간’이 허용되어서, 어쩐지 공부와는 무관한 과목으로 느껴졌기에 부담이 적었다.



그렇게 나는 학창시절을 지나면서 은근히 체육을 홀대했는지도 모른다. 우선순위에서 가장 미뤄두어도 큰 탈이 없는 과목. 입시구조에서 나타나는 체육에 대해 갖는 흔한 인식이었는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운동하는 보람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쉬는 시간마다 밖에 나가 실내화를 신고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린 채 교실로 들어왔고 그러한 그들의 ‘쉼’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땀 흘리고 난 후의 상쾌함을 알지 못했다. 땀이 적은 편이어서 운동으로 땀을 흘릴 만큼 진심으로 한 적이 드물었고 땀은 상쾌함이 아닌 불쾌함이었다. 그때는.



땀 흘리는 보람을 알려준 건 필라테스였다. 아파트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프로그램 중 하나로 기존보다 착한 비용으로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2000년대 초니까 필라테스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당시 이름도 낯선 새로운 운동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활기찬 선생님의 밝은 기운 덕분이었는지 나는 매일 아침 벌떡 일어나 필라테스를 하고 학교로 향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운동의 효과는 지하철에서 즉각 나타났는데, 꾸벅 졸면서 가기 일쑤였던 것….



그러니까 나에게 맞는 운동은 매트 하나로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매트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얼마나 몸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인가? 소도구들이 추가될 수 있지만 기본은 매트다. 달랑 매트 하나가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동작의 세계가 몹시 매혹적이었다. 필라테스의 창시자 조셉 필라테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감 되었고 수용소 안에서 그동안 섭렵했던 다양한 운동을 정리하여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재활에 참여하면서 재활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필라테스가 재활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바탕이다.



조셉 필라테스 


필라테스의 기원은 ‘나마스떼’하고 나직이 말하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면서 마무리는 요가와 얼마나 다른가? 겉으로 보이는 동작은 닮았지만, 동작이 만들어진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요가와 필라테스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어쨌든 요가와 필라테스는 매트로 시작해서 매트로 끝난다. (기구로 하는 동작들은 제외한다면) 시작과 끝이 같다. 매트 계열 운동만 나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협소한 좋아함인가. 운동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내가 마음 쏟는 곳은 지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과연 운동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망설이게 한다. 




필라테스 자격증 준비하던 시절


가령, 마라톤은 매트 조차 필요 없는 맨몸으로 하는 장거리 경주인데 한 번도 도전한 적이 없거니와 앞으로도 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내가 달릴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가장 놀란 대목은 하루키가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과 겨루는가였다. 그가 출전했던 울트라 마라톤은 기존 마라톤 42.195킬로 보다 보다 긴 100킬로를 달려야 하는 극단적인 장거리 경주다. 그는 11시간 42분 동안 한순간도 걷지 않고 100킬로를 완주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라는 기도문을 외우며 그는 하나의 순수한, 달리는 기계가 되었던 것일까.




하루키는 기계가 아닌 어떤 존재가 되었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달리기로 구축한 삶의 한 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보여준다. 존재보다 행위가 먼저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른다.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중요한 자질 세 가지를 꼽는다. 문학적 재능, 집중력, 그리고 지속력. 소설가에서 작가로 범위를 넓혀도 글쓰기에 필요한 자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쓰는 재능, 집중력, 지속력. 아! 이렇게 적고 보니 집중력과 지속력도 재능이구나.




하루키가 장편을 쓰는 힘의 근원은 달리기에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라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그가 달리기를 선택한 것은 충분히 의도적이다. 소설 쓰기는 마라톤 풀 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며 달린다는 것은 소설 쓰기에 관한 좋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웠다’고 하지 않은가. 소설 쓰기가 철저히 몸의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인간이 하는 행위 중에 몸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만 읽기나 쓰기에 관해서는 정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머리를 쓰는 일이라고. 물론 머리를 쓰기는 하나 그 전에 몸을 써야 한다. 읽을 책을 손으로 가져와야 하고 혹 금방 눈에 띄지 않을 때는 책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한다. 겨우 찾은 책을 손에 들고 원하는 장소로 간다. 책을 펼친다. 눈을 굴려 글자를 읽고 페이지를 손으로 넘긴다. 어떤 책은 머리를 쓴다는 의식도 없이 그냥 읽힌다.



쓰기는 장소에 관해 더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특정 장소에 가야만 글이 잘 써지는 경우, 이미 쓰기는 몸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몸이 기억하는 분위기와 느낌이 닫힌 생각을 열고 글을 쓰게 한다. 적당한 장소에 가지 못 한다면, 허락된 장소에 내 몸을 적응시켜야 한다. 가령, 부엌 식탁. 눈 앞에 할 일이 산재해있지만 못 본척 무시하고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뻐근해진다. 하루키처럼 대단히 오래 쓴 것도 아닌데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왜 힘이 드는가?!



몸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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