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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Feb 18. 2022

완두콩 공주

나의 단점도 약점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린 시절 읽던 동화 속엔 도저히 감정을 이입할 수 없는 딴 세상 공주님들 투성이였다.  초면의 할머니가 주는 사과를 씻지도 않고 덥석 베어 무는 백설 공주. 댁을 구해준 건 나라고 적어 알릴 생각도 안하고 그저 아름다운 목소리가 안 나와 서러운 인어공주. 왕자의 배우자를 구하는 목적의 무도회라는 걸 빤히 알고 갔으면서 어디 사는 누군지 통성명도 안하고 12시 다 되도록 정신 놓고 춤만 춘 신데렐라. 또래보다 시니컬한 어린이였던 내 공감을 이끌어내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공주들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 유전자 어딘가에 공주의 그것이 섞여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완벽한 이입을 이끌어낸 공주가 하나 있었으니, 일명 ‘완두콩 공주’다. 


 지금 읽어보면 진정한 공주를 찾겠다며 12겹 매트리스 아래 완두콩을 넣어둔 왕비도, 그것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는 공주도 딱히 좋은 본보기의 어른은 아닌데 어린이들에게 뭘 전달하는 동화인지는 모르겠다. 공주를 꿈꾸는 어리석은 소녀들아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다- 같은 건가. 뭐 아무튼 생뚱맞게도 시니컬 어린이 하나가 저격당하긴 했지만. 


 이미 기질적 예민함을 스스로도 느끼던 나는 속으로 그랬던 것이다. ‘아- 완두콩이라니. 그럴 수 있겠다. 밤새 거슬렸을 수 있겠어.’ 물론 12겹 매트리스는 조금 선을 넘었고, 문학적 비유를 감안해서 두툼~한 요 밑에 뭔가 거슬리는 하나가 있다고 생각하면 계속 신경 쓰였을 거다. 좀 더 이입해서 ‘그렇다면 왜 거슬리는 무언가를 제거하고 다시 자지 않는지’ -까지 생각해보자면, 분명 잠들 수 있을락 말락 한 몽롱한 상태를 확 깨우고 싶지 않았을 거다. 나도 그런 이유로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상태로 밤을 새워 본 일이 있으니까. 


 심지어 나에게는 완두콩 공주와 거의 흡사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현 남편 구 남친의 친구 커플 동반) 난생 처음 캠핑이라는 걸 가게 되었는데, 내 잠자리 매트 아래 작고 뾰족한 돌멩이가 엉덩이 쪽을 자꾸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뜩이나 어색한 상태로 누웠는데 소란 떨며 매트를 들추고 돌멩이를 색출하고 싶지도 않고, 편한 마음으로 잠들기엔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한 돌멩이의 존재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온 정신은 돌멩이에 꽂힌 채 눈만 감고 밤을 꼴딱 새웠다. 



 예민한 기질은 뭐 하루아침에 병이 낫듯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요즘의 나는 매사에 지랄맞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하겠다. 잘 때를 예로 들면 암막커튼은 기본, 가습기 전원 불빛이 거슬릴 수 있으니 몸체를 뒤로 돌려놓고, 자기 전 온수매트에 주름이 잡힌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다. 전직 디자이너의 습관이 남은 탓인지 베개의 위치는 항상 그리드를 고려해 매트리스 위 끝에서 8센티미터, 옆 끝에서 12센티미터 떨어진 곳을 가늠해 놓는데 이것까지 말하면 내가 너무 또라이 같…… 하아.


 그리고 반 년 전쯤부터는 잘 때 이어플러그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또 프로 예민이의 삶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원래 자는 동안 오만가지 소리에 다 반응하는 편이었다. 새벽에 물 마시러 거실을 가로지르는 강아지의 챡챡챡 발소리, 같은 침대를 쓰는 남편의 불규칙적 숨소리(규칙적이어도 거슬릴 마당에), 이웃집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아파트 복도를 나지막이 울리는 새벽배송 기사님 발소리까지.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으면 이런 생활 소음은 다 차단되는데다가 과장을 조금 보태 광활한 우주에 둥둥 떠 자는 느낌이 든다. 잠에 빠져드는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다. 이어플러그 만만세! (저처럼 잘 때 소음에 민감하신 분은 꼭 써 보시길.)


 사실 예민한 기질처럼 단점이나 약점으로 치부되는 성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내 경우에도 자라면서 별스럽다는 둥, 별것도 아닌 일로 지 마음을 들볶는다는 둥, 피곤하게 산다는 둥의 얘기만 들어와서, 내가 가진 기질이 분위기를 흐리거나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지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노력이 오히려 예민함을 가중시켰을지도? 


 어떤 계기로 예민한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콕 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나이를 먹으며 서서히 나라는 사람에 순응하지 않으면 괴로운 건 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무던한 척 발버둥을 쳐 봤자 파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타인에게 수치스럽게 들키기 십상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인정하고 남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음껏 예민을 부리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예민한 성질머리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디테일한 디자이너일 수 있었고, 내 몸에 생긴 병도 제 시기에 알아차렸다. 어떤 기질도 단점만 가질 수는 없다. 다만 강박의 형태를 띨 정도의 예민함을 남에게 전가하는 건 절대 금지. 베개의 위치는 내 것만 맞추자. 다른 사람 베개 위치까지 손대는 순간 오은영 박사님과 상담이 필요해질지 모른다.


 어딘가에 위축되어 있을지 모를 완두콩 공주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굳이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으로 푹 잤어요- 하고 거짓말할 필요 없다고. ‘아우 씨, 빌어먹을 완두콩 때문에 꼴딱 샜어요!’ 라고 인상 팍팍 쓰며 말할 필요도 물론 없다. 내가 드러내도 되는 예민함의 범위는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모두 편한 그 둘레 안에서만. 그 안에서는 마음껏 공주티를 내보자. 성에 찰 만큼 요란한 준비를 마친 뒤에 빠져든 잠은 더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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