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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Mar 01. 2022

순간에 머무는 연습

잠드는 것 하나만 생각하듯 순간에 충실해보기



 요가를 하며 자주 듣게 된 표현이 있다.


- 순간에 머물다


 ‘순간’이라는 단어와 ‘머물다’라는 단어 모두 입에 머금으면 한없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다가도 막상 이 표현을 들을 때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상 더없이 괴로운 자세를 하고 ‘어떻게 더 머물란 말이야…’ 하며 파들거리는 근육에 온 힘을 쏟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링 위였다면 탭이라도 쳤을 텐데. 매트위의 세계는 고요하고 냉혹하다. 


 지나간 고통도, 다가올 고통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현재의 내 상태에만 귀기울이는 게 요가에서 말하는 순간에 머무는 법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방금 전, 혹은 오래 된 지나간 일들에 마음을 쓰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워 하니까. 그렇게 허비한 순간을 모으면 인생 후딱이겠다. 그래서 요가를 하며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단련하는 법까지 조금씩 깨달아간다- 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요가 새싹은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순간에 머물다’라는 말과 함께 항상 떠오르는 어처구니없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사실지 모를 유리 겔러씨 되시겠다. 나의 어린 시절 TV에 세계적인 초능력자라며 소개된 그는 슥삭슥삭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숟가락을 구부리고, 강력한 눈빛으로 고장 난 시계를 움직이게 했다. 심지어 화면을 노려보며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시계까지 멈추게 한다고 했고, 다음날 학교에는 자기 집 시계가 정말로 멈췄다고 간증하는 못 미더운 관종들이 더러 있었다. 이 무렵 집집마다 악력으로 휘어버린 가엾은 숟가락 몇 개씩은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누구나 훈련하면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는 유리 겔러의 말에 꽤나 감화를 받아, 그날부터 자기 전 특훈에 돌입했다. 잠잘 준비를 다 마친 불 꺼진 방 이불 속에 누워 손목시계 불을 켜놓고 10분 동안 ‘멈춰라’ 라는 주문을 외며 시계 바늘을 노려보았던 것이다. 초능력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지만 일단 멋지니까. 염력으로 필통에서 지우개 정도는 꺼내 허공에 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애들이 환호하겠지. 그냥 이 정도의 사고 과정을 거치자마자 냅다 손목시계를 멈추는 걸로 첫 단계를 정해버렸다. 


 아마 한 달 정도였던 것 같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시계바늘과 씨름 한 것이. 그때도 느꼈지만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만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멈춰라’라는 생각이면 충분한데, ‘과연 멈출까?’라는 의심부터 내가 이걸 얼마동안 했더라, 성공했다한들 이걸 누가 믿을까, 엄마는 왜 내 시계줄을 안 바꿔주지, 빨간색이라 영 질리는데, 이불 속 발가락이 간지러운데 긁어도 되나- 까지 별 오만가지 잡생각이 의식을 툭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매번 실패하고 잠들 때마다 그 원인은 내가 ‘멈춰라’라는 생각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 탓이라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로 시계가 멈췄다. 영영 멈춘 것은 아니고 한 4~5초 정도. 그러니까 그 시간 동안 시계가 멈춘 건 나만 본 것이고 증명도 못한다. 나는 너무 놀라 이불 속에서 감격의 내적 환호를 내지르다가 이윽고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연 진짜 본 게 맞는지 내가 너무 오래 들여다봐서 착각을 한 건지. 혼자서 갈등에 휩싸였다가 잠들 무렵에는 잠시 동안이나마 시계가 멈춘 게 맞고, 영영 멈추지 않은 건 역시 내 수련이 부족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훈련은 없었다. 한 달을 투자한 것 치고는 성과가 미미했고, 학교까지 숟가락을 가져와서 억지로 구부리며 아귀힘만 키웠던 아이들도 슬슬 초능력에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내 더딘 훈련 속도로는 먼 훗날 초능력자가 되어 봤자 아무도 놀라지 않을 테지.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며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유리 겔러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단련했듯 그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건포도 명상’이라는 것이 있다. 건포도 한 알을 의도적으로 생소하게 바라보고 살펴본 뒤 만져서 촉감을 경험하고, 입에 넣어 천천히 깨물며 맛과 냄새, 입 안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이 있으면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뒤 다시 건포도로 주의를 가져간다. 생각과 감정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먼 곳으로 흩어져 버릴 때, 다시 내 의식이 있는 이 곳으로 불러들이는 연습이다. 무심코 씹어 넘겼던 건포도 한 알도 이 명상을 통하면 그 동안 몰랐던 맛과 풍부한 식감이 느껴진다. 


 순간에 집중하면 그렇다. 지나간 것을 붙드느라,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느라 놓친 많은 것들을 충분히 경험하게 된다. 손끝에서 또각거리는 자판 소리, 둥실 뜬 듯 고소한 커피 향, 강물의 비릿함이 묻어나는 바람 같은 것들. 의식하지 못하고 흘려버린 많은 것들이 서서히 나에게 되돌아온다. 앞으로도 우리는 예측조차 되지 않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야 할 텐데, 모든 것을 기록해 둘 수도 계산해 둘 수도 없다. 그저 한 순간 한 순간에 오롯이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실한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될 테니까.


 초능력자가 될 만큼의 단련은 필요 없지만 자기 전 간단한 연습을 할 수 있다.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을 걷어내고 하나의 생각만 남기는 연습. 그 시간 어차피 우리가 떠올려야 할 단 한 가지 생각은 뻔하다. 잠이 드는 것. ‘잠이 든다’ 이외의 모든 생각은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두자. 아무리 누워 머리를 쥐어짠다한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겁을 먹고 머릿속에 요새를 지어도 닥칠 일은 닥친다. 그냥 그대로 두자. 순간에 귀기울이다보면, 어느 새 그 순간은 지나가고 다음 순간에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푹 잠드는 것만큼 나의 순간에 충실한 건 없다. 그리고 혹시 세월이 흐르면 맘먹은 순간 바로 잠들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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