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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Feb 24. 2022

야간 침대열차의 추억

기대를 내려놓고 일어나는 일들을 즐기기



 처음부터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의도치 않게 반복된 베트남에서의 체류로 체득하게 된 건 기대를 내려놓는 마음가짐이었다. ‘에이, 설마 그래도~’에서 ‘에휴, 역시나. 그럼 그렇지’로 넘어가는 과정을 수도 없이 겪은 생활 덕이다. 고시원방보다 더 작고 어딘가 텁텁한 냄새가 풍기는 침대칸을 마주한 나는 또 생각했다. 아… 그럼 그렇지.


 안개의 도시 사파에서의 여행은 굳이 따지자면 괜찮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정말로 그렇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는 처음이라 꿈속을 걷는 듯 했고, 그 안개 덕에 인도차이나의 지붕이라는 판시판에 올라도 아무 풍경도 볼 수 없었다. 그 무렵의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시달려 완벽한 쉼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아름답고 이국적인 배경 속에서도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불만족을 내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색색의 천으로 머리를 땋은 사파의 소수민족이 안내해주는 작은 폭포도 좋았고 아내가 직접 만든 반미를 선물로 챙겨주신 유창한 영어의 호텔리어도 좋았지만, 진흙길에 대책 없이 더러워지는 신발이라든가 습한 공기를 즐겨 모여드는 나방 떼 같은 것에 금방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다. 


 하노이로 돌아오는 길은 모험심 가득한 남편이 겁도 없이 덜컥 자정에 출발하는 침대열차를 예약해두었다고 했다. 

“와- 미친 거 아니야? 호텔에서도 잘 못 자는 난데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자라고? 씻을 데도 없을 텐데 그 찝찝한 상태로 그냥 가자는 거야?”

 싸운 건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쏟아 부었다. 그저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었을 뿐인 남편은 속수무책 말로 얻어맞고, 실망 후 ‘거봐라’를 시전할 미래의 나까지 감당해야 했다. 딱하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특별히 2인실을 예매했다고 했는데 상태가 그랬다. 머릿속으로 같은 사이즈의 4인실, 6인실이 있다는 걸 떠올려보았다. 가능한가? 옆으로 돌아 눕다가 어깨가 끼어버릴 높이인 걸까? 뭐, 그래도 칸 바깥쪽에 양치질과 세수를 할 수 있는 공용 세면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대강 어수선한 잠자리를 준비했다. 


 불을 꺼도 도저히 잠들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진 땅을 걸은 탓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벽에서부터 엉성하게 매달린 침대는 열차의 진동과 소음을 고스란히 받아쳤다. 마땅히 벨 게 없어 둘둘 말아 머리 밑에 괸 옷도 가뜩이나 왕왕 울리는 머리 곳곳을 자극했다. 여기서 잠들 수 있으면 진짜 보통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남편의 얕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저 사람은 어디서든 3초면 잠이 드는 사람이었지. 내가 띄엄띄엄 봤어…


 드문드문 커튼 사이로 약한 빛이 오고 가는지 감은 눈꺼풀 위가 불규칙적으로 밝아지곤 했다. 잠은 진작 포기했고 남은 건 오로지 싫은 기분뿐이었다. 생각한대로가 아니면 매사에 곤두세우는 내 자신이 싫다. 어떤 상황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없는 게 싫다. 약해 빠진 정신도 차례차례 골병 들어가는 몸뚱이도 너무 싫다. 그렇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어둠 속을 달렸다.



 그로부터 꼬박 1년 뒤, 나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어떤 가능성도 점쳐지지 않았던 기존의 일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긴 세월을 괴롭히던 몸의 병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저 웅크린 채로 바로 다음 닥칠 상황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제야 서서히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라든가, 가보지 않은 곳을 여행하고 싶은 열정, 더 잘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들. 


 캅카스 3국을 여행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퇴사하면 가야지, 건강해지면 가야지 하고 엄두를 못내 우물쭈물 하던 일이었는데 막상 마음먹고 나니 실행에 옮기는 건 쉬웠다. 


 재미있는 건 그 여행에서 나는 또다시 자정에 출발하는 침대열차를 마주했다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국경을 넘어가는 열차였다. 실질적인 여행 시간을 확보하려고 이번에도 남편이 제안했고, 나는 기꺼이 응했다. 당황한 남편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번엔 왜 말로 두드려 패지 않는 거지? 하는 얼굴. 


 딱 사파에서 탔던 열차 침대칸과 같은 그 사이즈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짐 놓을 곳은 더 작았다. 심지어 칸 밖에 제대로 된 세면대도 없었다. 대강 물티슈로 얼굴을 문지르고 하나씩 지급된 시트와 베개커버를 대강 깔고 누웠다. 새삼스레 좋았다. 내 일상에서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낯선 곳,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거쳐 갔을지 모를 열차 안에 누워 밤을 관통한다니. 엉성하게 모양새만 갖춘 부스럭거리는 베개라든가, 무뚝뚝한 얼굴로 내일 기상 시간을 알려주는 승무원, 벽 너머 웅얼웅얼 들리는 이국의 말까지도 마음을 간질였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타지에서 잠드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정말 기대를 제대로 내려놓았던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건 실망에 대한 예측 또한 내려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기대 안 해.’ 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실망할 것까지 계산 해뒀으니까. 그렇게 하면 마치 내가 입을 타격이 줄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나는 주관적이긴 하지만, 가장 부정적인 상황과 가장 긍정적인 상황에 모두 직면하고 나서야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기대를 내려놓았을 땐 다가오는 순간순간이 모두 제각각으로 아름답다는 것.


 그렇게 아제르바이잔 끄트머리 어딘가를 달리는 깜깜한 열차 안에서 나는 모처럼 푹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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