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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13. 2024

시어머니 4 - 부엌대학 졸업자

부엌대학 졸업자


어머니는 복지관에 가지 않는 시간에는 그림처럼 거실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웃으면 어머니도 따라 웃고, 텔레비전이 화를 내면 어머니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도 어머니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거실에 함께 앉아 있지만 우리의 시간은 공유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간을 살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시간을 살았다.


그러다 한 번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림처럼 앉아 있던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녀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간 동화책을 무릎 쪽으로 끌어다 놓고 그걸 한 글자씩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동화책이 웃으면 글을 읽던 어머니 입가에도 미소가 잠깐 머물렀다.


나는 그녀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왜 그런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것은 나의 편견과 무심함의 조합이었을 거다. 그녀에게도 존재했을 소녀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시대의 암흑 속에서 글자를 캐내어 입술 사이로 삼켰을 어머니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1917년에 태어난 여자 아이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고,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글을 배웠을까.


그 여자 아이가 시간을 살고 또 살아낸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날짜를 잊고, 나이를 잊고, 드문드문 가족들을 잊는 가운데, 동화책의 한 대목을 낭독하는 목소리는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책 읽는 어머니의 장면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은 오래 전 일화를 하나 추억해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지, 전화기가 있는지, 방은 몇 개인지, 그런 것들을 캐묻는 가정통신문을 나눠 줬더랬다. 그런 것들을 다 적고 나면 부모의 학력도 물었다. 부모의 학력은 지금도 묻는 듯하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학교 어디까지 나왔수과?”

“나? 나 부엌대학 나왔져!”


글을 읽고, 방앗간 노동을 하고, 부엌일을 했던, 백 년을 산 여자는 위트까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물과 웃음과 노동과 생활이 거의 잦아 든 어떤 한 시기에 그녀와 살았다. 자기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동안 그녀의 책 읽기와 위트는 어떤 힘을 발휘했을까. 그 삶을 어떻게 지탱하고 위로했을까. 나는 끝내 알지 못할 삶이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요양원에 있던 그녀는, 살아왔던 거의 모든 시간을 잊고 함께 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잊었다. 어느 곳을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세계 너머를 응시하는 그런 눈동자로 어머니는 자신이 가장 젊은 날을 보냈던 납읍리의 어느 어느 골목길을 상세히 묘사했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곳은 4.3이 흉포하게 휩쓸고 갔던 마을 중의 하나였다. 그녀의 말대로 사람은 백년을 못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년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끝내 살기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붙들고 있었듯이.


#시어머니 #백세시대 #가족 #제주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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