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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11월 11일 이야기

이방인의 가슴에 달지 못한 퍼피꽃 한 송이, 그 안에 담긴 추모

by 김종섭

11월에는 다른 달보다 특별한 거리 풍경이 시작된다. 캐나다의 거리마다 사람들의 가슴에는 한 송이 붉은 꽃, 퍼피꽃(Poppy)이 11월 한 달 내내 달려 있다. 꽃은 양귀비꽃 모양이며, 퍼피꽃의 의미는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다.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브런스데이 (Remembrance Day)로, 우리나라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 추모의 상징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퍼피꽃은 11월 내내 사람들의 가슴 위에서 붉게 피어 있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퍼피를 단 사람들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길거리의 행인들 속에서도, 쇼핑몰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예전처럼 쉽게 보이지 않았다. 경기 침체와 각박해진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런 추모의 마음도 사람들의 일상 속 여유가 없으면 함께 식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가슴에 달린 퍼피꽃이 예전보다 희미해진 이유는, 아마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탓이 아닐까 싶어 왠지 슬퍼진다.


나 역시 캐나다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퍼피를 가슴에 달아본 건 잠깐의 경험이 전부다. 그 작은 꽃을 달고 다니기에는 선뜻 행동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는 ‘이방인의 상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리멤브런스데이는 캐나다인들의 마음속 깊은 애도가 깃든 날이다. 오늘은 몇 년 전 달았던 퍼피꽃이 있어, 다시 가슴에 달고 산책길에 나서기로 했다. 여전히 조금은 낯설고, 그들의 역사와 희생을 완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멀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퍼피 한 송이에 내 마음을 담았다.


오늘 내가 퍼피를 가슴에 단 행동에는 캐나다 장병들의 희생과 한국 6·25 전쟁에 참전해 의롭게 숨진 캐네디언 용사들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는 마음이 담겼다.


이렇게 캐나다의 침묵과 추모를 떠올리면서도, 11월 11일이 다가오면 마음 한 구석에는 한국에서의 ‘빼빼로데이’가 먼저 떠오른다. 한국에 살던 시절, 포장된 빼빼로를 직접 사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선물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은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가족이 함께 나눈 정이 담겨 있었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날이라 해도, 빼빼로데이는 단순히 과자를 사고파는 날만은 아니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작은 선물로 마음을 나누던 그 따뜻한 정서가 지금도 내 안 깊숙이 남아 있다. 아마 그런 인간적인 온기가 지금의 나를 여전히 한국인으로 남아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빼빼로데이 외에도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짜장면데이) 같은 다양한 ‘데이 문화’가 생겨났다. 상업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해도, 그 속에는 잠시 웃고, 마음을 나누는 계기가 담겨 있다. 특히 ‘떡국데이’처럼 쌀 소비를 촉진하고 국민들에게 전통 음식을 다시 알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런 날들이 단순한 마케팅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온기를 만들어주는 사회적 온도계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반면 캐나다의 리멤브런스데이는 조용하고 숙연하다. 빼빼로데이가 ‘웃음의 날’이라면, 이 날은 ‘침묵의 날’이다. 그 차이가 바로 이민자로서 내가 느끼는 정서의 간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붉은 양귀비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노병들이, 학생들이, 젊은 부부들이 조용히 퍼피를 가슴에 달고 걷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그들만의 추모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안에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마음, 이웃의 아픔을 내 가족의 일처럼 품으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전쟁의 상처와 평화의 소중함은 국적이나 언어를 넘어선 인류의 공통된 기억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6·25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처를 겪은 나라이다. 지금도 그 분단의 아픔을 겪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붉은 퍼피는 결국 우리의 추모와도 맞닿아 있었다.


한국의 현충일에도 묵념을 하듯, 이곳 캐나다에서도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되면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2분간의 침묵을 지킨다. 차도 멈추고, 상점도 멈추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다. 그 정적 속에서 들리는 것은 단 한 가지, 평화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 순간만큼은 이방인인 나도, 캐나다인도, 모두가 같았다.


그래서 올해 11월 11일에는 빼빼로 대신 작은 퍼피꽃 하나를 가슴에 달아봤다. 비록 이방인의 마음일지라도, 그 안에는 평화를 향한 같은 염원이 담겨 있을 테니까. 언젠가 이 작은 붉은 꽃 한 송이가 이민자의 마음에도 따뜻한 소속감을 피워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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